첫머리에
나 ‘오지지’와 아내 도키코는 1971년에 요코하마 히요시橫浜市 日吉에서 해바라기문고를 만들었습니다. 그 무렵 이시이 모모코石井桃子 씨의 《아이들의 도서관》이 출판된 것이 계기가 되어, 일본 곳곳에서 아동 문고가 활발하게 생겨났습니다. 아이들 독서 운동 조직도 몇몇 있었지요.
하지만 나는 그저 아이들이 좋고, 아이들 책이 좋아서 해바라기문고를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1960년대에 나는 중병에 걸려서 이름난 의사로부터 ‘당신에게 남겨진 시간은 이제 2년’이라는 선고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죽음을 선고받고 처음에는 좌절하여 이성을 잃었지요. 조금이나마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자, 내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죽음을 앞두고 ‘이것도 못 해 봤는데……, 저것도 해 보고 싶었는데…….’라고 때늦은 후회나 하며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무렵 나는 장인어른 나카이 마사카즈*의 사상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태평양 전쟁 후, 오노미치廣島県尾道市 도서관을 중심으로 폭넓은 문화 운동을 펼친 장인의 실천력에 관심을 두고 있었지요. 나는 장인어른과 같은 운동을 하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의 도서관, 아동 문고 운동이 활발하다는 것은 나에게는 금상첨화인 셈이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작은 서점을 열었는데, 비록 좁긴 했지만 우리 집을 송두리째 개방해서 아이들을 받아들였습니다.
* 나카이 마사카즈(1900~1952): 철학자, 평론가, 사회운동가, 히로시마 출신. 국립국회도서관 부관장 역임. 대표 논문을 비롯한 그의 저작은 전전 전후를 통해 진보적인 문화인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음.
처음에 찾아온 건 꼬맹이들이었어요. 60명 정도 되는 아이들이 우리 가정의 모든 생활과 활동을 순식간에 뒤흔들어 버렸습니다. 아이들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넘쳐 나는 에너지에는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 무렵 아이들에게는 함께 놀 또래 친구도, 놀 만한 곳도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새로 나타난 우리 해바라기문고가 아이들 눈에는 즐겁게 놀기에 딱 알맞은 장소로 비쳤는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은 빌린 책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서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뛰어놀고는 했지요. 나에게는 화나는 일도 많이 있었지만, 그동안 사라졌던 골목대장이나 또래 집단이 다시 생겨나는 것을 보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나는 아이들을 책 속의 세상에만 가두어 놓고 싶지가 않았어요. 아이들이 가진 힘을 한껏 드러내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어린이가 주인공’, ‘일탈에는 이유가 있다’, ‘책이 없어도 아이는 자란다’, ‘놀이를 대신할 책은 없다’ ― 그때 내가 아이들에게 배운 것들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지금도 내 신념의 일부가 되어 있습니다. 이런 표현들은 일부 아동 독서 운동가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따뜻하게 받아 주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나는 돌아가신 사이토 쇼고斉藤彰吾 씨를 중심으로 한 ‘부모와 아이 독서센터’ 여러분에게서 용기를 얻을 수가 있었지요.
‘어린이가 주인공’은 가장 먼저 아이들에게서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60명으로 시작한 해바라기문고는 몇 년 뒤에는 3,000명 남짓한 큰 단체로 자라났습니다. 우리 집으로는 더 수용할 수가 없어서 마을 회관으로 자리를 옮겨 히요시 지구에 열 개나 되는 작은 문고가 더 생겼습니다.
아이들의 바람으로 장난감도 손수 만들기 시작했어요.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 장난감과 아이들이 직접 고안해 낸 것들까지, 거의 100가지가 넘는 손수 만든 장난감들을 아이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일본 각지에 있는 문고에 널리 퍼졌습니다. 어린이 시장, 어린이 잔치, 캠프에도 성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이 기존의 캠프장 생활에 갈수록 흥미를 잃게 되자, 캠프는 야생적인 방향으로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6년이 지나자 때로는 군마현群馬県의 깊은 산속, 더군다나 곰이 나타나는 곳에서 장기간에 걸친 캠핑을 하기에 이르렀지요.
아이들이 중심을 이루면 아이들 단체는 강해집니다. 아이들은 어른들 마음대로 쥐락펴락하지 않는 자유로운 어린이 집을 갖고 싶다며 서명 운동을 펼쳐서 시청에 신청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시청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번에는 아예 ‘어린이 마을’을 짓고 싶다고 했습니다.
나는 아직까지도 아이들을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늘 해오던 일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롭게 나아가는 모습이 정말로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고를 만든 덕분에 늘 아름다움에 감동할 수 있게 되었지요. 어린이 마을을 갖고 싶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어쩌면 아이들이라면 나를 넘어서서 그곳에 다다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진심으로 들었습니다.
우리는 어린이 마을을 세우기 위해 먼저 홋카이도北海道*의 타키노우에瀑上라는 동네로 이주했습니다. 다행히 그 마을에서 우리에게 공유림을 공짜로 빌려 줬습니다. 이곳이 바로 지금까지 내가 살고 있는 숲입니다.
* 홋카이도Hokkaido, 北海道: 일본의 북쪽 끝에 있는 지역. 홋카이도 본섬과 부속 도서로 이루어져 있고, 서쪽으로 동해, 북쪽으로 오츠크 해, 동쪽과 남쪽으로 태평양에 접해 있다. 냉대 기후로 여름과 겨울의 기온 차가 매우 크며 낙농업과 어업이 발달했다. 동해 쪽에는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고, 태평양 연안에는 여름에 바다 안개가 발생하며, 오호츠크 해 연안에서는 겨울에 유빙을 볼 수 있다.
1983년, 제1회 여름 어린이 마을이 열렸습니다. 전국에서 800명 남짓의 어린이들이 참여했지요. 전기를 비롯해 편리한 것이라고는 아예 없는 숲 속에서의 오랜 캠핑, 물질의 풍요로움을 즐기는 이 세상에서 굶주림마저 경험할 수 있는 거친 야외 생활……. 우리의 새로운 시도는 과연 널리 이목을 끌었던 것일까요?
그 무렵을 되돌아보면, 어쩌면 내 마음속에 무엇을 해도 다 잘될 것이라는 오만함이 자리 잡기 시작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순풍만범*일 때일수록 ‘좋은 것’을 끊는 용기와 보잘것없는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는 겸손함이 필요했습니다.
* 순풍만범順風滿帆: 돛이 뒤에서 부는 바람을 받아 배가 잘 달리는 모양.
1985년, 결국 큰 사고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어린이 마을이 후반부에 접어들었을 무렵 아바시리 시까지 통하는 길을 나흘 만에 걸어가는 ‘4일간 걷기’라는 프로그램 도중 아이들 행렬에 승용차가 돌진해서 두 명이 죽고, 세 명이 다치는 큰 사고가 난 것입니다.
아이들의 힘을 믿고 뭔가를 하려면 위험은 따르기 마련입니다. 아이들의 손을 놓고 아이들이 대담하게 행동하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는 일은 중요한 일이지요. 하지만 아이들의 힘을 끌어내려면 한편으로는 세심하게 신경을 써서 혹시라도 일어나게 될 여러 사태들을 예상하고 검토하여 아이들과 함께 안전에 대해서 조금도 허술함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전제 조건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아이들의 행동을 간섭하고 관리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어떤 작은 목숨도 살아서 빛을 낼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얼마나 소중히 해야 하느냐 하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작은 성공에 기고만장해 있던 나는 이 소중한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게 사고로 이어진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단순한 교통사고일지 몰라도, 아이들을 죽게 만들고 상처를 입힌 책임은 모두 나에게 있습니다.
눈앞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태가 벌어지자 그 무렵의 나는 부끄럽게도 몹시 당황해 허둥거렸습니다. 나에 대한 날카롭고 거친 비판도 나왔습니다. 목숨을 잃고 상처를 입은 아이들의 아픔, 유족들의 슬픔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하고, 걸핏하면 자신을 두둔하며 변명을 늘어놓기에만 바빴던 나는 어떤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어린이 마을을 일시 중지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꼭 지속해 줬으면 한다는 아이들의 성원도 있었습니다. 나는 누구의 말이 옳은지 판단이 서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답을 알 수 없는 바에야 아이들의 바람을 존중하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여름 어린이 마을을 지속하는 것으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고 때문에 소중한 친구나 젊은이 가운데 일부는 나를 떠났습니다.
이 사고는 생명의 소중함을 어떻게 해야 지켜낼 수 있을까라는 어려운 과제를 나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이것은 머리로만 생각해서 답을 얻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온몸과 마음으로 그것을 느끼고 싶었어요. 하지만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답답한 시간만 흐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우울한 상태에 빠져 여름 어린이 마을 40일 동안만 빼고, 방에 틀어박혀 어둠 속을 헤매며 때로는 죽음까지도 생각했습니다.
그랬던 나를 일으켜 세운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해바라기문고와 어린이 마을 출신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여름마다 찾아오는 아이들이었습니다. 함께 생활하는 식구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나를 잡아 주지 않았다면 나는 나 자신을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숲과의 만남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어요. 생명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 주는 그 뭔가가 숲 속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습니다. 나 자신이 아예 끝장을 보겠다는 각오로 숲 속에 틀어박혀서 한번 깊은 생각에 잠기고 싶다는 마음이 확실히 있긴 있었지만, 한편으로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나를 숲이 부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영하 30도나 되는 겨울에 숲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주변 사람들에게 야단도 많이 들었지만, 나의 마음은 이미 숲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1991년 걸프 전쟁이 한창이던 겨울, 나는 숲에서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로부터 12년,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았다는 거창한 말까지는 못하더라도, 나무도 생명, 풀도 생명, 새나 벌레나 동물들까지 모두 나와 똑같은 생명으로 바라볼 수는 있게 되었지요. 사람을 다른 생물들 위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진심으로 들었습니다. 풀 하나 베는 일에도 망설이게 되는 그런 마음이 겨우 내 안에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어찌 되든 상관없는 생명이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몸소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숲은 사람이 허상뿐인 풍요로움, 편리함 따위 때문에 내버리고는 뒤돌아보지 않게 된 것들에 관한 소중함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야말로 아이누*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무엇을 가지고 싶은 욕망도, 무엇을 먹고 싶다는 욕구도 없이 그저 행복하게 사는 일상을 실감나는 기쁨으로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 아이누Ainu: 일본의 홋카이도(북해도)와 러시아의 사할린, 쿠릴 열도 등지에 분포하는 소수 민족. 15~18세기만 해도 아이누 사람들은 홋카이도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캄차카Kamchatka 반도의 남부, 북쪽으로는 사할린의 남부, 남쪽으로는 일본 혼슈의 동북부 지역까지 널리 분포하고 있었다. 사할린과 쿠릴 열도의 아이누는 북방 민족이나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홋카이도의 아이누와는 문화적 차이를 나타내며, 강제 이주 등으로 오늘날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홋카이도의 아이누도 급격한 인구 감소와 민족 정체성의 상실 위기를 겪고 있다. 홋카이도에 거주하는 아이누의 수는 1993년에 23,830명이었지만, 2000년 3월에는 23,767명으로 자꾸만 줄어들고 있다. 근대 이후 일본 정부와 사회는 아이누의 문화와 전통을 미개하다 여기고 그들을 일본인으로 동화시켜야 한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아이누 사람들을 하이遐夷(오랑캐)라 부르며 멸시했다. 메이지 정부는 아이누의 전통 생활 관습을 강제로 금지시켰으며, 홋카이도 개척 과정에서 아이누를 강제로 이주시키고 그들의 토지를 약탈했다. 이에 따라 오랜 기간 독특한 문화를 가꾸어 왔던 아이누의 전통 문화는 파괴되었으며, 아이누 사람들은 억압과 차별을 받아 왔다.
나는 숲을 ‘’이라고 적습니다. ‘나무(木)’가 많이 있다는 걸 뜻하는 ‘숲(森)’이 아니라, ‘나무(木)’와 ‘물(水)’과 ‘흙(土)’ 사이에서 모든 생명들이 빛을 내며 자라나는 곳-바로 이곳이 숲()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앞으로의 시대가 분명 ‘숲()의 시대’가 올 것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이들에게서 생명을 얻었고, 이제는 숲에서도 계속해서 생명을 얻고 있습니다. 나는 하루하루 숲의 생명들한테 살아가는 힘을 얻고, 그들에게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 기분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어린이 마을’을 ‘숲 속 어린이 마을’로 바꾼 것도, 미래를 짊어질 아이들이 숲과 만나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지금 ‘숲 속 학교’를 만들려 하는 것도, 숲의 생명들로부터 배움으로써 사람이 마주하고 있는 위기 상황을 깨달아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길을 함께 찾아갈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숲에 살고, 숲에서 배우는 길은 새로운 숲의 시대를 갈구하는 나 자신의 길임과 동시에 내 잘못으로 목숨을 잃게 된 아이들에 대한 끝없는 속죄의 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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