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타자 공동체
소크라테스 이전의 고대 그리스, 인디아, 페르시아, 중국에서 활동한 현자들의 지혜와 다르게 철학사상은 처음부터 공동체 건설을 위한 대의명분과 연계되었다. 합리적 지식은 새롭고 단일한 공동체─원칙적으로 무한한 공동체─를 통합하는 하나의 공통담론을 생산한다.
합리적 과학은 인디아 문명, 중국 문명, 마야 문명, 잉카 문명 같은 대규모 정착 문명들의 경험지식, 혹은 저마다 대체로 가혹한 환경들에서 관찰한 결과들을 가지고 수세기간 생존해온 유목민들의 경험지식과 구별되지 않는다. 『야생정신La Pansee Sauvage』(1962)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아마존 강 유역의 원주민들이 저마다 속한 환경들을 엄밀하게 경험적으로 재현하는 방법을 세련해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들의 재현절차들은 풍문風聞이나 어림짐작과 유효한 지식을 면밀하게 분류하는 과정들이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환경에 속하는 자연물들과 생물들을 종류별, 성질별, 용도별로 분류하는 방법은 현재 우리의 식물학, 동물학, 약제학藥劑學이 정보들을 분류하는 방법보다 대체로 훨씬 더 포괄적인 것이었다. 그들의 재현방법들은 관찰과 증명의 경험적 엄밀성을 긴박하게 요구하는 우리의 재현방법들과 동등했다. 그것들의 실현과정을 제한한 것들은 오직 그들의 인식력이 접근할 수 있는 지역의 한계들과 그들이 사용하는 탐색도구들 및 실험도구들의 기술적 한계들뿐이었다. 더구나 그들의 지식조직체들도 지식을 조직하는 양상들 고유의 응집성과 일관성을 띠는 만큼 우리의 식물학, 동물학, 지질학, 기상학, 천문학에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서양인들이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관찰결과들의 축적물들이 아니라 설명체계들이다. 에드문트 후설은 ‘과학과 철학을 발생시키는 합리적 의지는 이유理由를 제시하려는 의지이다’라고 정의했다. 이유들은 사고력의 산물들이기 때문에 합리적 지식은 ‘이질적 세력들의 행위가 개인들에게 남기는 인상들의 총합’으로 제시되기보다는 일종의 ‘구성작업’으로 제시된다. 서양인들이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서 사고력은 기록되고 분류된 관찰결과들의 모든 집합을 설명하기 위한 이유를 생산하려고 애쓴다. 무릇 ‘이유’란 관찰결과들을 추론해내기 위한 근거로 여겨질 수 있는 더욱 일반적인 공식이다. 우리는 그런 공식을 경험법칙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사고력은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이유를 제시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노력이 바로 우리가 이론理論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것을 근거로 경험법칙들이 연역적으로 추론될 수 있다. 사고력이 창출하려고 애쓰는 것은, 예컨대 고에너지입자물리학에서 양자역학이론과 상대성이론과 전자기장이론이 파생될 수 있는 표준모형과 같은, 모든 과학적 연구분야의 모든 이론을 아우를 수 있는 단일한 이론이다. 하이젠베르크는 합리적 과학의 노력은 “모든 기본입자의 속성들과 함께 모든 물질의 작용들을 설명할 수 있는 단일한 기본방정식을 정립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썼다. 철학은 합리적 절차들을 밟는 이유들을 제시하려고 애쓰며, 합리적 사고력과 현실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들을 가다듬고, 합리적 사고력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들을 물색한다.
이유를 제시하려는 의지는 일정한 담론실천을 규정한다. 예컨대, 그리스의 상업항구도시들에 도착한 이방인들은 그리스인들에게 ‘당신들은 왜 그렇게 행동합니까?’라고 물을 수 있다. 저마다 차이점을 가다듬는 인간집단들로 구성된 모든 사회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우리의 조상들이 그렇게 행동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쳤기 때문이고 우리의 신神들이 그렇게 행동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정도로 요약될 것이다. 그런 조상들과 신들을 가지지 않은 이방인이 인정할 수 있는 이유─즉 제정신의 소유자라면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이유─를 그리스인들이 제시하기 시작하면 새로운 과정이 시작된다. 이유를 제시하는 그런 언설행위들은 보증행위들이다. 그렇게 대답하는 사람은 자신의 진술을 보증하고 그렇게 진술하는 이유와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이유를 제시한다고 보증한다. 그 사람은 자신의 진술에 책임을 진다. 그 사람은 자신이 모든 질문에 답변한다고 보증한다. 그 사람은 모든 이방인을 자신의 재판관으로 이해한다.
합리적 실천은 모든 제정신의 소유자를 위한 공통적이고 단일한 담론을 가다듬는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에 관해 말하는 것과 자신이 책임지는 것’이 ‘타자들이 말하는 것들’과 함축적으로 얽혀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합리적 담론체계 전체는 여느 연구자들을 포함하여 합리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진력하는 모든 사람의 진술들에 함축된다. 사람들 각자는 서로에게 공통담론의 재현자로서 말한다. 그런 사람의 개인적 통찰들과 발언들은 보편적 이유에 관한 익명적 담론의 부분이 된다.
그리하여 이런 담론실천은 원칙적으로 무한한 인간 공동체에 호소한다.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 각자는 타자를 대면하면서 정언명령을 대면하는데, 그 정언명령은 그들 각자가 만나고 통찰하는 모든 것을 보편적 용어들─즉 모두가 아는 정보가 될 수 있는 형식들─로 공식화시킨다.
‘당신들은 왜 그렇게 행동합니까?’라고 질문하는 이방인에게 ‘우리의 조상들이 그렇게 행동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쳤기 때문이고 우리의 신들이 그렇게 행동하라고 우리게 명령했기 때문입니다’라는 식으로 대답하는 담론은 그런 식으로 말하는 다수자들의 차이점을 가다듬는다. 특히 그런 담론은 합리적 담론처럼 내부적으로 단일하지 않다. 이질적 세력들의 행위가 개인들에게 남기는 인상들을 공식화하는 진술들 사이에는, 토착민들의 다수가 말하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암호들로 재생되는 ‘조상들이나 신神들이 공인한 언명들’의 다수성이 존재한다. 조상들이나 신들의 언명들이 결정하는 행위들은 그 조상들이나 신들의 탄생시점과 탄생장소를 찾으려는 모든 사람을 공동체의 작품들이나 기념비들에 순조롭게 편입시킬 수 있지만, 그런 작품들은 그들이 속하는 종족이나 선택된 종족의 차별적 특성을 정교하게 가다듬어준다.
합리적 담론의 생산과정은 행위를 변질시킨다. ‘우리의 말 못하는 고유한 충동들과 열망들’이 유발하는 행위들은 ‘우리에게 고유한 것들은 아니되 타자들에게 동의를 구하는 이유들’이 유발하는 행위들로 변질된다. 그런 행위유발요인들은 타자들의 노력들을 공동행위욕구들에 편입시킬 수 있기 때문에 집단행위들로 변할 수 있다. 타자들은 저마다 자신의 실력과 열정을 사업들에 투여하는데, 그런 사업들은 그들을 흡수하여 탈脫개인화시키고, 그들 없이도 지속되면서 속행되거나 해체된다. 우리가 공공장소에서 진행되는 우리의 사업들이나 타자들의 사업들을 바라볼 때 설명하는 그 사업들의 이유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동시에 모두에게 속하는 것들이다.
합리주의자들인 우리는 착수되고 실현되는 작업들의 현실성 안에서 한 공동체의 구성원들로 존재하는 (우리의) 현실성을 인지認知한다. 우리는 공동체 자체를 일종의 작업으로 인지한다. 우리의 담론이 지니는 합리성은 ‘제시되고 생산되는 이유들’ 안에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유를 일종의 작업─사업이나 업적─같은 것으로 인지한다. 우리가 생산하는 합리적 담론은 집단적 사업들로 구현된다. 공동체를 건설하는 과정은 노동분업을 조직화하는 산업에 협력하면서 시장에 참여하는 과정을 의미할 것이다. 그것은 곧 타자들과 협력하여 공동으로 작업하고 소통하는 과정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가 ‘작업들은 곧 집단적 사업들이다’라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사고행위─즉 우리가 스스로 응답하고 합리화시켜 우리의 것으로 간주하는 사고행위─가 일종의 재현작업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는 북아메리카의 공공건물들과 기념관들에서 우리와 같은 북아메리카인들에게 각인된 행위요인들과 목표들을 본다. 우리의 공장들, 공항들, 고속도로들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 우리가 원하는 것들, 우리의 계획들’ 가운데 우리가 이유를 붙이고 선택한 것들을 본다. 우리의 법률체계와 사회제도들에서 우리는 우리의 공식화된 체험, 판단, 토의된 여론을 인식한다. 우리의 합리적이고 집단적인 사업들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이질적인 것, 낯선 것, 이해될 수 없는 것을 원칙적으로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의 것들만 발견할 따름이다. 우리의 공공기관들, 공공건물들, 공공집회들에서 우리는 발리 섬 주민들이 하는 것과 같은 생각─즉, 이질적인 정령들 혹은 악마적이고 신적神的인 세력들이 방문한다거나 화산들과 강물들과 하늘들의 세력들이 체결한 협정들이 재난을 유발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인간들의 신들이 발신하는 것들로 생각되는 신호들의 이면에서 우리는 인간들의 심리적 욕구들과 충동들이 공유하는 이유들을 발견한다.
아마존 원주민들의 생각에서, 혹은 인류의 조상들이 어떤 건축물도 남기지 않고 4백만 년 동안 유랑한 동아프리카 지구대East African Rift Valley에서 살아가는 마사이Masai족 유목민들의 생각에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이질적인 세력들이 우리에게는 이질적인 개별정신들의 다양성들에 억지로 덧씌운 채로 내버려둔 인상들에 관한 기억뿐이다. 우리는 도로들, 수로水路들, 항구들, 사원寺院들, 기념관들에서 어떤 공동체의 증거와 그 공동체가 과거에 존재했다는 표시들을 알아본다. 우리는 그 공동체로 하여금 그런 증거와 표시들을 생산하게 만든 이유들을 구성함으로써 그 공동체로 진입한다. 중국의 만리장성, 남아메리카의 안데스 산맥을 누비는 잉카제국의 도로망, 이집트와 중앙아메리카에 건설된 피라미드들, 앙코르와트의 관개시설에서 우리는 지금도 우리가 재현하는 사고방식을 발견한다. 우리의 경제학, 정치학, 생태학, 심리학, 심리분석학은, 그런 집단작업들을 명령하는 조상들이나 신들의 것들로 인식되는 언명들의 이면에서, 그런 작업들을 시작하게 만드는 이유들을 공급한다. 그런 작업들은 토착종족이나 선택된 종족의 차별적 특성을 구현하던 건설작업들이 되기를 중단한다. 그런 집단작업들의 결과물들을 건설하라고 명령하는 조상들이나 신들의 것들로 인식되는 언명들의 이면에서 우리는 우리가 그런 건설작업들의 이유들을 가다듬으면서 그 작업들의 결과들을 보존하거나 재구성해야 할 이유들도 가다듬어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보편적 인류에 동참하고, 또 뒤늦게나마 중국인들, 아스텍인들, 크메르Khmer인들도 보편적 인류에 동참시킨다.
우리는 우리의 환경에 속한 동물들, 식물들, 광물들에서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증거를 목격한다. 우리는 우리의 물리적 환경을 이해함으로써,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런 환경을 생산하게 만드는 이유들을 재구성함으로써 그 공동체로 진입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공동체가 살아가는 환경은 우리의 공동체가 생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환경을 우리에게 유용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사물의 자연환경과 그 사물’을 연계시키는 사물의 본성 같은 사물의 속성들이 아니라, 우리가 설계하고 배치해온 도구체계에 사물이 삽입될 때 그 사물이 드러내는 속성들이다. 합리적 실천은 우리 주위의 실천 가능한 장소를 집단사업들을 위한 공공장소로 변화시킨다. 벌목된 목재가 실용되려면 먼저 직사각형 판목板木으로 켜져서 가공되어야 한다. 나무들도 처음에는 다양한 식물과 섞여 자라더라도 중간에 적당히 솎아지고 가지들도 쳐져야 나중에 목재로 실용될 수 있다. 두통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진 버드나무껍질도 껍질 상태 그대로 사용되기보다는 그것에서 추출하여 정제한 성분이 가미된 아스피린 알약으로 제조되어야 효험을 발휘한다. 오늘날에는 생물공학을 통해 육종된 농작물들을 토양재배법이 아닌 수경재배법으로 재배하는 공장식 농장들도 있다. 또한 유전공학을 이용하여 기존에 특허 받은 동식물들의 새로운 종種들을 개발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우리의 연구실들은 연구자들이 자연존재들을 연구하는 대신에 자연계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고 오직 연구실에서만 생산되는 순수한 물, 순수한 유황, 순수한 우라늄을 연구하는 장소들이다. 원소주기율표는 이제 환원 불가능한 자연의 명세서가 되지 못한다. 모든 원자는 분열되고 융합되어 변성變性된다. 이유들을 생산하고 또 그 이유들이 생산하는 공동체는 그 공동체의 존속수단과 지식재료를 생산한다.
하나의 생물종인 우리는 스스로를 생산하는 일종의 인공인간man-made들이다. 엄청나게 확장된 대뇌피질, 신체를 구성하는 신경조직망의 복잡성, 확장된 대뇌피질만큼 커진 엄지손가락의 대표성, 직립자세, 털 없는 신체로 대변되는 우리의 특수한 생물학적 특징들은 우리를 다른 영장류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자연적으로 진화한 것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상징체계들을 발명한 결과로서 그리고 문화─도구들을 사용하고 개선하며, 사냥 및 채집을 조직화하고, 가족을 구성하며, 불火을 사용하고 관리하는 과정이자 특히 적응·소통·자기관리용으로 사용되는 (언어, 의례, 예술 같이) 유의미한 상징체계들에 의존하는 과정─에 반응한 결과로서 진화한 것들이다. 이런 유의미한 상징들은 그것들을 사용하는 다수자의 차별적 특성을 묘사한다. 우리의 특수한 생물학적 특징들은 이런 특성을 특정한 종족의 특성으로 구체화시킨다. 유의미한 상징들을 합리적으로 가다듬는 작업은 우리가 속한 생물종을 어떤 보편적 공동체를 재현하는 개인들로 구성된 생물종으로 만들면서, 우리의 생물적 특수성을 변화시킨다.
합리적 담론과 실천은 자연을 공동작품으로 만들고 우리의 천성을 우리의 작품으로 만든다. 우리의 환경을 생산하는 우리 같은 문명인들은 그 환경에 속한 모든 것에서 집단적 인간의 의도들과 노력이 자연적인 것들에 부여한 형식과 모양과 종류를 알아보는데, 그런 인위적인 것들은 합리적 담론의 실천을 통해 생산된 것들이다. 자신이 생산한 환경에서 자신의 본성을 생산하는 인공적인 생물종에 속하는 우리는 모호하고 이해할 수 없는 ‘자신에게도 이질적인 자신’의 내면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자신이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지녔다고 확신하며 자신의 법률들을 스스로 제정하는 입법자로 자처하는 현대문화의 개인’은 자신의 개체성을 자기폐쇄적인 어떤 본성의 개체성으로 가공하기 시작한다. 인간 공동체 안에서 그 개인은 자신의 내면에 폐쇄된 자신만의 사고체계를 재현하는 어떤 작업을 발견한다. 자신의 사고체계가 합리적 사고체계 전체를 재현한다고 생각하는 개인은 자신의 동료인간을 보고도 자신의 합리적 본성의 반영反影밖에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합리적 공동체가 있기 전에 먼저 타자와─즉 침입자와─마주치는 과정이 있었다. 마주침은 한 사람이 스스로를 타자의 요구들과 주장들에 노출하면서부터 시작된다. 합리적 공동체─구성원 각자의 제정신이 재현하기만 할 따름인 공통담론을 가진, 그리고 각자의 노력과 열정을 흡수하여 탈개인화시키는 사업기획들을 가진 공동체─의 바로 밑에는 또다른 공동체가 존재한다. 이 또다른 공동체가 요구하는 것은 구성원 개인─그 공동체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자신의 본성을 생산하는 개인─이 스스로를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사람─이방인─에게 노출하는 행위이다.
이런 ‘타자 공동체’는 단지 합리적 공동체에 흡수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분신分身, double이나 그림자처럼 재발하면서 합리적 공동체를 괴롭히는 것이다.
‘타자 공동체’는 [합리적 공동체의]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형성되기보다는 오히려 작업과 사업들이 곤란을 겪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타자 공동체는 [합리적 공동체의 구성원이] 어떤 공통점을 보유하거나 생산하는 과정에서 현실화되기보다는 오히려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 사람─예컨대 아스텍족, 유목민족, 게릴라, 적군敵軍─에게 스스로를 노출하는 과정에서 현실화된다. 타자 공동체는 타자를 대면하는 사람이 타자의 얼굴에서 정언명령을 인식할 때 형성된다. 그 정언명령은 타자를 배제하는 공통담론과 공동체를 문제시할 뿐 아니라 타자를 대면하는 사람이 타자와 함께 공유하거나 공동으로 건설하기 시작한 모든 것을 문제시한다.
하나의 정언명령에 스스로를 노출하는 사람은 자신의 합리적 지식능력만 노출하지 않는다. 우리가 합리적 지식능력을 발휘하려면 ‘이해하기 쉬운 규칙적인 방법들로써 환경정보를 수집하기 마련인 우리의 감수성’을 자유자재로 제어해야 하고, ‘실천 가능한 현장에서 작용하는 강제력들과 장애물들과 인과관계들을 이해하기 쉬운 규칙적인 방법들로써 답파하는 우리의 동력들’을 자유자재로 활용해야 하며, ‘사회현장에서 작동하는 명령복종관계들을 이해하기 쉬운 규칙적인 방법들로써 준수하라고 타자들에게 명령할 수 있는 우리의 감수성’을 자유자재로 발휘해야 한다. 타자에게 자신을 노출하는 사람은 자신의 벌거벗은 맨눈, 물건을 쥘 때는 꽉 움츠렸다가도 타자를 향하면 활짝 펴지는 자신의 맨손, 타자의 목소리와 섞이면 사라져버리는 결함을 지닌 자신의 목소리도 노출한다.
타자─이방인, 빈민, 재판관─에게 스스로를 노출하는 사람은 의문시될 수 있는 자신의 통찰들과 개념들뿐 아니라 자신의 맨눈, 목소리와 침묵들, 맨손도 타자에게 노출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상대하는 타자─이방인─도 자신의 확신들과 판단들뿐 아니라 결함, 감수성, ‘죽어야 할 운명’마저 그 사람에게 노출하기 때문이다. 그 타자는 자신의 얼굴, 우상, 물신을 그 사람에게 노출한다. 그 타자는 흙으로 돌아갈 먼지 같은 탄소성분들로 만들어진 하나의 얼굴─흙과 공기, 온기, 피血, 빛과 어둠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얼굴─을 그 사람에게 노출한다. 그 타자는 고통과 ‘죽어야 할 운명’을 간직한 흉터지고 주름진 살肉을 그 사람에게 노출한다. 그 사람이 헐벗은 자, 빈민, 노숙자, 죽어가는 자─타자─에게 노출될 때 공동체가 형성된다. 그 사람은 자신과 자신의 강제력들을 확인하기보다는 오히려 손해 보는 지출과 희생에 자신을 노출함으로써 공동체에 가입한다. 그렇듯 공동체는 개인이 타자에게, 외부의 강제력들과 권력들에, 죽음에, 죽어가는 타자들에게 스스로를 노출하는 운동과정에서 형성된다.
정보교환과정에서 형성되는 합리적 공동체는 추상적 존재자들─이상화理想化된 지시대상들의 이상화된 기호들─을 교환한다. 소통과정은 서로 무관하고 상충하는 신호들─잡음─에서 메시지를 추출하는 과정이다. 대화자對話者들은 잡음에 대항하는 투쟁을 위한 동맹자들이 된다. 소통을 위한 이상적인 도시는 잡음이 최소화된 도시일 것이다. 그러나 잡음은 메시지의 내부─메시지를 전달하는 목소리의 모호함─에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의 목소리마저 침묵되지 않으면 침묵될 수 없는 세계의 배경잡음이 존재한다. 우리는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목소리를 상상함으로써 인간의 목소리들이 존속하고 서로 공명하는 세계의 잡음을 듣는 방법을 깨우친다.
우리는 세계를 소란스럽게 만드는 불평불만에 대항하여 동맹하는 공동체 속에서 신호들과 추상적 존재자들을 통해 서로 소통하는 과정을 벗어나면 비인간적인 것들을 그것들의 형식과 내용마저 포용하면서 접촉한다. 또한 우리는 상대방의 형식과 접촉함으로써─우리의 고유한 육체적 상태를 변성變性시킴으로써─서로 접촉한다.
공통점을 생산하고 진리를 공인하여 바야흐로 복제물들을 위한 기술적技術的 우주를 설립하는 공동체는 야생인간들, 신비주의자들, 심리병자들─그리고 그들의 발언들과 육체들─을 배제한다.
그런 공동체는 그들을 그 공동체의 고유한 공간─그들을 고문하는 공간─으로 배제한다.
합리적 공동체가 한창 작업하는 와중에 형성되는 공동체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의 공동체─죽음과 ‘죽어야 할 운명’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그렇다면 인간들을 서로 분리시키고 격리시키는 죽음은 공통죽음common death일까? 그리고 그런 죽음은 아무것도 아닌 무無로서 분류될 수 있을까?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