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행동 양태와 습관
전에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보통 때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묻지 않죠? 상황이 바뀔 때, 또는 긴급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 때, 미래를 예측하기 힘들고 현재까지 대응해 왔던 방식으로 미래에 다가올 사태에 대비하기 어려울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옛 농촌처럼 한 마을 공동체가 우주 전체가 돼서, 거기서 태어나고 자라고 늙어 죽어 뒷산에 묻히는, 시간이 지혜의 함수가 되는 삶 속에서는 이런 질문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곳에서는 오랫동안 슬기롭게 살아오면서 가뭄도 겪고 큰물도 겪고 관혼상제 같은 여러 가지 삶의 경험을 통해서, 어떤 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아는 어른들이 살길을 일러 줍니다. 구태여 젊은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묻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어 줍니다.
시간이 지혜의 함수가 되는 농경공동체뿐만 아니라, 공간적인 경험의 확장이 지혜의 함수가 되는 유목공동체에서도 떼 지어 다니면서 목축을 하거나 부족한 목축지를 두고 각축전을 벌이게 될 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장 강인한 사람이 앞장서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해 주기 때문에 여기서도 이런 질문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질문이 나오는 곳은 도시사회인데, 특히 개개인이 자기 삶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 부딪힌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나옵니다.
도시사회라 하더라도 상황과 체제가 안정되어 있을 때는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이 독재로 말미암아 강제된 상황이든 민주적인 합의에 따라 서로 용인하는 그런 상황에서든 그 상황이 안정되어 있다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나오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강당 안을 걷는데, 이 강당 바닥은 평탄하기 때문에 왼팔과 오른팔이 움직이는 각도가 어떤지, 보폭이 어떤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쏟지 않습니다. 평탄한 길에서 제 동작은 자동화됩니다. 보폭과 팔이 움직이는 각도가 가장 편하고 효율 높은 상태로 조정이 됩니다. 우리 신체 동작이 자동화되는 것은 필요한 일이긴 합니다. 우리가 걸을 때 머리로 ‘어깨각과 왼팔이 움직이는 각을 몇 도로 하지? 왼손은 이런데 오른손은 몇 도로 하지?’ 이렇게 계속해서 거기에 집착하면, 강박관념 때문에 우리 두뇌는 아무 구실도 하지 못하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작을 자동화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깜깜한 밤길을 걷는다든지 깎아지른 벼랑을 타고 산에 오르게 될 때는 보폭 하나하나, 손동작 하나하나에 일일이 신경을 쓰게 됩니다. 이렇게 새로운 사태에 직면해 있을 때만 주의attention가 집중됩니다. 우리 몸동작을 어떻게 해야 이 새로운 상황에 제대로 대처해나갈 수 있을지 숙고를 하게 되고, 그 때문에 그때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자기 내면에서 솟아오르게 됩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 의식은 잠들어 있기 쉽고, 자동화된 상태에서 우리의 신체 동작은 기계화됩니다. 외적인 강제가 엄청나게 심해서 도무지 다른 길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 조성될 때나 그런 체제에 있을 때도, 우리 의식은 짓눌리고 동작은 최소한으로 바뀌면서 자동화가 됩니다. 이때 자동화되는 의식이 보이는 반응과 행동이 가장 무섭습니다. 비극적인 상황이죠.
동작에서 자동화는 개인 행동에서 습관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삶에 길들게 된다는 말이죠. 상황이나 체제가 완고하게 오랫동안 변하지 않을 때, 우리의 사고라든지 행동 양태가 그것에 길들어서 습관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집단화된 습관은 관습으로 고착됩니다.
모든 것이 외부 요인으로 해결이 될 때도 거기에 젖어서 길들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습관도 거기서 형성됩니다. 사회적으로 더 큰 범위에서 보면 관습이 형성되죠. 그리고 그 관습은 윤리나 도덕으로 나타납니다. 법 형태로도 나타나죠. 그런데 법은 강제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관습이나 윤리, 도덕보다도 가변성이 더 큽니다. 잘못된 체제에서도 우리가 그 체제를 뒷받침하는 도덕률을 익히고 그 체제의 윤리와 규범을 내면화하는 것이 가장 큰 비극 상황입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죠?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고, 있을 것이 없고 없을 것이 있는 세상이 나쁜 세상이라고요. 우리가 없을 것이 있는 세상, 그러니까 억압, 불평등, 증오, 전쟁, 이기심, 탐욕들이 만연된 세상에서 ‘세상은 그럴 수밖에 없는 거니까, 여기에 적응해서 내 살길을 찾자’ 이렇게 길들고 그 상황이나 체제에 자기 자신을 순응시킨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래서 행동 방식이라든지 사유 방식을 특권화시키게 되고, 그것이 한 사회 전체를 지배해서 증오와 이기심, 탐욕이 들끓는 사회제도와 체제를 받아들이게 될 때, 희망이 없는 거겠죠? 나쁜 세상에 물든다는 것은 우리한테 비판적인 성찰을 마비시킨다는 점에서 대단히 절망스러운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없을 것, 없어야 할 것, 있을 것, 있어야 할 것은 현재 시제가 아니라 미래 시제로 표현됩니다. 있는 것을 있다고,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참말’이고 정직한 증언입니다. 하지만 미래에 다가올 삶과 연결되는 당위라고 하는 것, 윤리 규범,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미래의 삶에 대한 전망이 바로 서지 않으면 족쇄나 올가미가 되기 십상입니다. 과거의 굳어진 가치관을 기초로 해서, 그 과거와 현실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미래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판단한 나머지 없을 것이 분명이 있는데도 그것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마비된 의식이 우리 행동을 마비시키고, 없어야 할 것이 가득 찬 이 세상에 주저앉히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우리 행동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어떤 식으로 길들게 되는가, 그것이 길게 봤을 때 어떤 습관을 형성하게 되고 또 한 사회에서 관습으로 굳어지는가에 대해서 깊이 성찰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대로 농경사회에서는 어른들이 자연과 맺은 관계 속에서 경험을 얻고 그것을 내면화해서 하나의 관습으로, 윤리관이나 가치관, 도덕률로 굳히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유목사회에서도 그 위험은 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도시사회는 어떻게 보면 흡혈귀들이 대낮에도 설치는 식인 사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혹시 <델리카트슨 사람들>이라는 영화를 본 적 있습니까? 이 영화에서는 식량을 돈으로 쓰고, 사람고기를 먹죠. 겉으로 드러나지만 않을 뿐이지 모든 도시사회는 식인 사회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사는 사회입니다. 여기에 대한 아무런 근본 성찰 없이, 우리는 자기가 처한 상황과 어떤 체제 속에 사느냐에 따라서 자기 정체성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지요? 그렇죠? 하지만 그 변화는 일종의 변형이나 변환Metamorphosis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동화나 습관, 윤리, 도덕이 형성되는 과정을 잘 꿰뚫어 보려면 고도의 비판의식과 창조적인 지성이 필요합니다. 비판의식이 왜 필요하냐면, 없어야 할 것이 있을 때, ‘이건 없어야 할 것인데, 없애야 하는데’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처방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판의식은 행동으로 나타날 때 파괴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기존 질서를 파괴하거나 기존 도덕률, 기존 가치관을 거부하기도 하고, 실제 현실에서 파괴 활동으로 나타나기도 하죠.
9.11테러가 일어난 게 언제였죠? 그때 군산복합체를 상징하는 세계무역센터 건물과 미국 국방성 건물을 테러리스트들이 공격했죠. 세계에서 제일 센 나라가 어디지요? 제가 우리 학생들한테 물어봤더니 미국이 제일 세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쳐요. 그래서 제가, “이 바보들아, 미국이 왜 제일 세냐? 아프가니스탄이 제일 세지” 이렇게 말한 뒤에 아프가니스탄이 제일 센 이유를 말했죠. 세계에서 국민소득이 가장 낮은데다가 어찌나 외교 역량이 부족한지 파키스탄 하나와만 국교를 맺고 있고, 미국이 무서워서 나머지 나라들은 모두 국교를 단절한 나라인 아프가니스탄에, 군사가 오만명 정도밖에 안 되는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미국이 혼자 쳐들어가기 무서워서 예순 여섯 나라를 줄 세워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아프가니스탄은 그전에도 강력한 소련군이 와서 탈레반을 소탕하려고 쑥대밭을 만들었는데도 버텨 냈어요. 또 외교 역량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어서, 한때는 미국 돈 받아서 소련하고 맞장 떠서 살아남기도 했죠. 그런데 현재 상황은 어떻습니까? 미국을 비롯한 힘센 연합군들이 곤경에 빠져 있지요? 그러니 아프가니스탄이 최고로 센 나라 아닙니까?
제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일어났을 때 삼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고 어디에 썼는데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금 삼차 세계대전은 진행 중입니다. 여러분도 믿지 않죠? 제일차 세계대전과 제이차 세계대전이 국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식민지를 뺏으려고 싸운 전쟁이라는 고정관념이 그대로 우리 뇌리에 박혀 있기 때문에, 삼차 세계대전도 국가들 사이에 땅뺏기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제는 성격이 달라졌습니다. 더블유티오(WTO) 체제도 세계대전의 한 형태인데, 완성된 금융 독점자본에게 국경은 의미가 없습니다. 미국은 아직까지 오사마 빈 라덴 같은 테러리스트들과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전쟁 책임을 돌리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엔 제삼차 대전 형태는 내란입니다. 저는 전쟁이 내란 형태로 전개되는 것이 인류를 위해서 큰 다행이라고 봅니다. 왜 그러냐면 옛날처럼 국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편 갈라서 싸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럼 인류를 몇천 번 몰살시키고도 남을 만한 핵무기가 가동될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 안에서 전쟁이 벌어지게 되면 핵무기는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됩니다. 적과 아군이 뒤섞여 있으니까 자기 나라 안에서 핵무기를 터뜨릴 수는 없죠. 그래서 이제 비로소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가, 국가라는 단위를 중심에 놓고 애국심을 내세워 서로 결탁해 다른 나라 형제들에게 총을 겨누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왔다고 보면 됩니다. 세계 제이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게 될 때 사해동포주의를 부르짖고 국제 연대를 주장했던 사람들이 결국엔 애국심에 불타서 동료들 가슴에다 총을 겨누었죠. 이제는 적어도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국내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자기를 노예화시키고 착취해야 살 수 있는 계급이 누구고, 자기가 연대해야 할 계급이 누구냐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최소화하면서 전선을 넓혀 갈 수 있습니다.
그 모범을 9.11테러가 보여 줬는데도 이 사람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맞장 뜨자고 하는데, 그건 뻔하죠. 석유 욕심 때문에 그러는 거죠. 제가 이런 말을 하면 곧 잡혀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쨌든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상황에 따른 인간의 의식과 행동 변화
비판은 쉽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때려 부수는 일은 삽시간에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안을 제시하는 것, 이렇게 때려 부수고 나서 여기다 무엇을 쌓아 올릴 것이냐를 의논하고 실행에 옮기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없을 것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쉽게 동의할 수 있어서 누구든지 민감하게 대응을 하고, 없애야 한다고 뜻을 모읍니다. 스스로 행동에 옮기지는 못해도 없애야 할 것이라는 의식은 분명히 갖습니다. 하지만 ‘있어야 할 것’인데 지금 없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서로 편안하게 살자, 서로 사이좋게 살자, 전쟁은 안 돼’ 이런 빛 좋은 말로 때우는 것을 넘어서서 구체 실천과 연관 지어, ‘이건 없는데 우리가 빚어내야겠어, 길러내야겠어, 만들어야겠어’ 이렇게 뜻을 모으고 힘을 기르려면 창조적인 지성 결집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아주 애 터지고 지루하고 힘든 건설 과정이 요구됩니다. 그런데 건설은 우리가 머리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머리 쓰는 일도 필요하지만 건설은 손과 발, 몸을 놀려서 합니다. 손발이 제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몸이 튼튼해야 건설 사업에 동원이 되죠.
중국에 문화혁명이 있었죠? 중국에서 문화혁명이 일어나고 십여 년 이상을 마오쩌둥이 생존해 있었고, ‘사인방(四人幇)’이 전면에 나섰을 때는 세계가 온통 중국 문화혁명에 열광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체 게바라를 읽고 다니듯이 그때는 마오쩌둥이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최고의 혁명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 사인방이 몰락하고, 급속도로 경제력이 떨어지게 되고, 세계열강 대열에서 멀어지게 되면서, 그리고 또 문화혁명 기간에 피해가 엄청나게 늘어나고, 비판의식과 창조의식을 겸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핍박을 받으면서 치르게 된 대가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결국엔 덩샤오핑 체제가 등장하면서 급속도로 시장경제 쪽으로 경제정책을 바꿔 오늘날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되었죠.
중국에서 부정부패는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온 사람에게 직접 들은 말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 같았으면 그 정도로 부정부패가 심하면 나라가 거덜 났을 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라는 괴물 경제를 유지하면서도 아직 희망이 있는 까닭은 문화혁명 시절에 농촌이나 공작소로 하방되었던 많은 청소년들이 지금 중국공산당에서 중간 간부가 되어 국정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이 희망입니다. 이 사람들이 문화혁명 때, 어떤 사람은 스스로 지원하고 어떤 사람은 강제로 끌려가서 농촌에서 몇 년, 공장에서 몇 년씩 몸으로 때운 신체 기억이 방부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거의 모든 공산당 당원들이고,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는 두터운 층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부패가 널리 확산되지 않고도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 가능한 체제가 꾸려진 것입니다. 몸으로 겪고 때우는 게 그렇게 중요합니다. 우리 의식은 별로 믿을 게 못 됩니다.
체제와 상황이 사람을 규정하는 힘이 너무 커서, 책상머리에서는 혁명가이기도 하고, 영웅이기도 한 사람들이 현실에서 상황이나 체제 압력에 짓눌리게 될 때 어떻게 망가지고 변하게 되는지는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설득을 통해서나 토론을 통해서 사람이 변화되는 것만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에 따라, 생산관계가 건강하게 바뀌면서 생산력이 증가하고 그 증가한 생산력은 무한히 다양화되고, 무한히 커 가는 욕망을 무한히 충족시키게 되고, 그렇게 되면 쪼는 질서pecking order가 없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겁니다. 페킹 오더pecking order는, 먹이를 적게 줬을 때, 가장 힘센 닭이 다른 닭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다 쪼아서 쫓아 버린 뒤에 혼자만 먹이를 독차지해서 마음껏 먹다가 배가 차면 물러나고, 그다음 힘이 센 놈이 또 쪼고, 배가 차고, 물러나고, 그래서 힘없는 놈은 나중에 비리비리 말라 죽는, 힘센 놈 중심으로 세워진 위계질서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것을 쪼는 질서라고 합니다. 마르크스와 레닌은 생산관계가 건강해져서 생산력이 무한히 발전하게 되면 쪼는 질서가 없어지고, 자연히 평등한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런 신화를 믿지 않죠.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에서는 벌써 200년 전부터, 그리고 덩달아 우리 나라에서는 지난 50년 사이에 온 세상이 도시화되는 길로 접어들면서, 우선 지구라는 생태 환경 자체가 급속도록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무한한 탐욕에 길들어 있는 도시인들이 물질 에너지를 펑펑 써서, 과거부터 이어져 온 삶의 자산과 미래 자손들이 물려받아야 할 생명 자산까지 짧은 시간에 전부 탕진해 버리고 지구를 엉망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후손들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서 물려줄 것이라곤 전쟁과 굶주림과 증오밖에 없는 상황이죠. 지구라는 한정된 행성에 생명 자원이나 물질 자원이나 모두 한정되어 있는데, 이걸 펑펑 써버리면서 온 인류가 모두 무한히 증가하는 생산력에 따라서 무한히 증가하는 욕망을 무한히 충족시킬 수 있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지난 수십만 년 동안 인류는 생명 에너지와 생체 에너지로 살아가는 길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200년이 지나지 않은 짧은 기간에 인류는 삶의 양식이 급격히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물질 에너지에 기대지 않으면 너도나도 살길이 없는 세상으로 되엉 버렸습니다.
물질 에너지는 확산 에너지로, 폭발시켜서 얻는 에너지입니다. 이 폭발 과정에서 80퍼센트 넘는 에너지가 낭비되고 그 낭비된 에너지는 모두 대기를 오염시키고 수질을 오염시키고 토양을 오염시키는 산업 쓰레기로 바뀝니다.
여러분들 확산divergent과 응집convergent이란 말 알고 있죠? 생체 에너지는 응집 에너지입니다. 응집 에너지가 쓰일 때는 낭비 요소가 최소화되고, 산업 쓰레기도 발생시키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에너지가 순조롭게 순환하는 쪽으로 쓰이게 되는데, 현대 도시사회는 응집 에너지, 곧 생체 에너지만 써서는 살길이 없는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생체 에너지가 응집되어 있는, 정상 상태인 유기물은 자연과 인간관계 속에서만 생산되고 분배되고 소비됩니다.
삶과 생명체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미래가 없는 도시 문명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대로, 그야말로 되는 대로, ‘될 대로 되라’고 살아갈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지속 가능한 미래를 확보하기 위해서 이제부터라도 떨쳐 일어서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냐입니다.
도시에서 봉기한 혁명이 성공한 예는 역사상 한 번도 없습니다. 의회주의에 기대서 세상을 바꾸어 보려는 시도는 이미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예로 전 세계에서 주목을 받았던 칠레의 아옌데 정권을 들 수 있는데 결국엔 미국이 뒷받침한 군부 쿠데타 때문에 무너졌죠? 지금까지 인류 혁명의 거점은 늘 농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산과 혁명의 거점이었던 농촌이 다 무너져 버리고 있습니다.
제가 변산에서 십여 년 넘게 농사를 짓다 보니까, 이상하게 나무가 하는 말도 알아듣게 되고, 물고기가 하는 말도 알아듣게 되고, 들에 나가서 볍씨들이 수군거리는 말도 알아듣게 됩니다.
제가 사는 변산은 소나무가 많았던 지역입니다. 그런데 요즘에 변산 기후도 아열대성 기후로 바뀌면서 소나무가 급속도로 죽어 가고 있습니다. 소나무가 죽은 자리에 참나무가 자라는데, 가을이 오면 참나무는 많은 도토리 알을 떨굽니다. 한 해에도 도토리 수천 알을 땅으로 떨구는데, 제가 참나무에게 ‘우리 나라 산지가 70퍼센트인데 거기에 모두 네 씨만 뿌리내리게 하려고 그래?’ 하고 물었더니 아니랍니다. ‘그러면 해마다 뭐하러 그렇게 많이 떨어뜨려?’ 하고 다시 물엇더니 자기가 죽을 때쯤, 덜어뜨린 씨앗 가운데 한두 그루라도 건강하게 자라서 자기를 대신해 종이 유지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해요.
볍씨도 마찬가지죠. 한 번 심을 때 두 알 세 알 심으면 스무 포기로 늘어나는데 한 포기당 백 알 넘게 달리고 해서 풍년에는 볍씨 하나가 때로는 천단위로, 때로는 만 단위로 열매를 맺죠. 그래서 볍씨한테 ‘야, 들판 전부를 니 종자로 덮으려고 그래?’ 하고 물으니까 아니라고 그래요. 쥐도 먹고, 새도 먹고, 당신도 먹고, 그렇게 해서 씨앗으로 남은 것으로만 우리 종 유지하면 그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바다에 사는 숭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수억 개씩 알을 낳아서 태평양, 대서양까지 온 바다를 전부 니 새끼로 덮을 생각이냐?’ 이렇게 물었더니 아니라고 하죠. 그중에 한두 마리만 남아서 자기 종을 유지시켜 주면 그만이라고 해요. ‘그럼 나머지는 뭐 하려고 그렇게 많은 알이 필요하니?’하고 다시 물으면 자기 몸을 던져 다른 생명체를 살리고, 자기 새끼들도 그 생명체에 기대 살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알들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삼시 세끼 먹는 반찬들이 전부 이렇데 다른 생명체가 ‘생체 보시’해서 밥상에 올라온 것들입니다.
유한한 세계에서 무한한 생산력이라는 건 없어요. 그것은 신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 시대가 낳은 신화죠. 씨 하나 뿌리면 수천수만 알을 얻을 수 있는 유기물 세계에서도 무한이라는 건 없어요. 도시에서는 생산력의 5퍼센트만 늘어나도 ‘라인강의 기적’ ‘한강의 기적’ 이런 소리를 하는데 유기물은 무한 축적이 안 돼요. 곡식 씨앗을 2년만 묵혀 버려도 발아율이 현저히 떨어져서 곡식 구실을 거의 못합니다. 유기물은 오래 두면 썩어버리니까 싫든 좋든 나눠야 해요.
그런데 ‘생산력의 무한한 발전’과 ‘생산물의 무한한 축적’에는 썩는다는 개념이 없어요. 무한 축적이 가능한 것도 무기물밖에 없는데 그것은 전부 부동산이나 동산으로, 화폐나 유가증권 같은 것으로 되면서 종이쪽지 하나에 수억, 수십억까지 자산 축적이 가능한 세상이 되었어요. 그 자산은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는 한 자손만대에 물려줄 사유재산으로 법적인 보호를 받아요. 폭력적인 국가 기구가 이 사유재산을 보호해 주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질문을 던질 때, 도시 사람들은 답변할 길이 없어요. 도시 공간에서는 사람들만 모여 사니까 ‘착취하고 살거나 착취당하면서 살지 뭐’ ‘주인이나 노예로 살지 뭐’ 이런 대답밖에 할 수 없어요. 전체 생명이 얽히고설킨 그물망 속에서 모든 생명체가 서로 도와 그물을 만들어 가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아갈 길이 없어서 도시 사람들은 덫에 갇혀 있는 거예요. 그리고 환상 속에나 있을 법한 세계를 실제 세계라고 자기최면을 겁니다. 정신적인 유목민들이 우글거리면서 가상의 초원, 의식의 평원을 질주하고 있어요. 실재하는 평원이 아니라 등질화된 의식 공간을 질주하면서 ‘나는 지금 말을 타고 달리고 있다’고 상상을 해요.
어쨌든 밥상에 아침, 점심, 저녁으로 올라오는 것이 다른 생명체의 생명이고, 살아 있는 몸을 나에게 제공하는 거니까 이것을 먹고 뭘 ‘해야 할지’ 성찰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되는’ 대로 살 수밖에 없어요. ‘하면 된다’는 능동성은 사라지고, ‘되면 한다’는 수동적인 반응만 남아요.
주체성과 자율성
제가 자유를 이야기하면 ‘사회주의자인 줄 알았는데 자유주의자네?’ 이렇게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것예요. 자유에는 결이 여럿입니다. 노예 소유주의 자유 개념이 있고, 부르주아 자유 개념이 있고, 지주들의 자유 개념이 있고, 자본가의 자유 개념이 있고... 저마다 내세우는 자유들이 서로 결이 달라요. 무엇을 자유민주주의라고 그러죠? 자본주의를 자본민주주의라고 말하는 대신에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자유가 하도 좋으니까, 저마다 자기 체제, 자기가 신봉하는 이념에 민주도 끌어다 놓고 자유도 끌어다 쓰고 그래요.
우리 헌법에 보장된 자유가 뭐죠? 신체의 자유, 사상의 자유, 집회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이런 것들이 다 들어가죠? 추상적인 것 말고 거주이전의 자유, 신체의 자유, 여행의 자유 같은 소박한 것들을 생각해 봅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돈 없는 사람은 아무 자유도 없어요. 돈이 없으면 거주이전의 자유도 없고, 신체의 자유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헌법에 보장된 자유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돈이 있는 사람만 누릴 수 있는 자유예요.
여러분들, 추석이나 설 때마다 도시에 붙들려 있는 아들딸이 ‘어머니, 미안해요. 회사 일이 너무 바빠서 이번에는 못 내려가요’ 하는 이야기를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들어보셨죠? 고향이 돈이 없어서 못 가는 거예요. 돈이 없으면 여행의 자유도 없고 고향 찾아갈 자유도 없어요.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종만 있습니다.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아주 명쾌하게 갈라지죠. ‘흑인, 백인, 황인, 이런 인종 구별 없다. 있는 놈과 없는 놈, 딱 두 종류로 구별이 된다. 있는 놈은 다 있고, 없는 놈은 아무것도 없고...’ 이건 제가 한 말이 아니라 《셰익스피어 이야기》를 쓴 유명한 찰스 램이 한 이야기입니다. 오죽하면 없는 놈이라 그랬겠어요? 재산이 없으면, 돈이 없으면 존재조차 없는 거예요.
스탠포드 엑스페리먼트Stanford Experiment 이야기를 잠깐 떠올려 보지요. 이 이야기는 책으로도 나오고 영화로도 만들어져 있으니까 따로 긴 설명을 하지 않고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아홉 명이 죄수 역할을 맡고, 열두 명이 간수 역할을 맡은 가상 감옥에서 벌어지는 실제 이야기입니다. 이 실험에 자원한 20대 젊은이 가운데 열두 명은 네 명씩 삼교대로 간수 역을 맡게 됩니다. 간수가 되는 사람은, 죄수 역을 맡은 사람이 한 개인으로서 지닌 자기 정체성, 상식적이고 건강한 시민으로서 갖는 자기 정체성을 잃고 등질적인 죄수 집단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지침을 받습니다. 죄수가 된 사람의 자기 정체성을 끊임없이 없애서 비인간화시키는 것이 간수가 맡은 임무예요. 감옥 체제에 무조건 복종하도록 하는 것이 임무이기 때문에 간수들이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려면 죄수들을 비인간화시킬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의 정체성을 없앨 수밖에 없어요. 거기에서 죄수들한테 심각한 시간 왜곡 현상이 나타납니다.
보통 사람들은 생명의 시간 가운데 자연의 시간이 우리 몸에 그대로 작동을 합니다.
쥐들에게 실험을 해 봤는데, 인슐린 주사를 같은 용량으로 시간을 바꾸어서 투여하면 어느 시간대에는 백 퍼센트 죽고, 똑같은 양인데도 어느 시간대에는 한 마리도 죽지 않습니다. 우리 몸 안에 저항이 커지고 줄어드는 생명의 주기들이 있는 거예요. 시계로 측정되는 인간의 시간에는 이런 게 하나도 없는데, 복종을 끌어내기 위해선 생명체가 지닌 자연의 시간, 곧 생명의 시간을 등질화시킬 필요가 있어요.
감옥에서 간수 역을 맡은 사람은 교대 시간이 되면 무조건 호루라기를 불어서 죄수 역 맡은 사람을 일으켜 세워요. 그래서 체제에 순응하고 권위에 순종하도록 팔굽혀펴기 같은 온갖 종류 벌들을 주는 거예요. ‘너희들은 이제부터 사람이 아니다, 너희들은 개성이 없다, 감옥 안에서 일률로 밥은 몇 분 안에 먹고 소변 보는 시간은 몇 분 만에 끝내라.’ 이렇게 모든 것을 통제하게 된단 말이죠.
이 상황에서 죄수로 자원했던 선량한 중산층 대학생이(처음에는 모두 죄수로 자원하겠다고, 간수하기 싫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돈을 받고 계약해서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진짜로 감옥에 갇혀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나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말하면 금방 나올 수 있는데, 못 나와요. 그리고 간수 역을 맡은 사람들은 점점 잔인해지고, 나중에는 취미 삼아서 성적인 학대까지 하게 됩니다.
이라크에 주둔한 미군들이 포로들을 자기들 전리품으로 생각한 나머지 그 사람들 목에다 줄을 매서 끌고 다니고, 성적인 모욕을 주고, 그 행위를 사진으로 찍어서 자랑스럽게 공개하는 일이 벌어져서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이슬람 세계에서 성적인 모욕이라는 것은 엄청난 상처를 주는 일입니다. 목숨은 내놓을망정 그런 짓을 당하지는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인데, 바로 그런 반응에 가장 큰 약점이 있으니까 그 의지를 완전히 꺾어 버리려고 그 잔혹한 짓을 태연하게 저지릅니다.
그 미군들이 스탠포드 실험에서 나오는 20대 초반 젊은이들과 똑같은 사람들이죠.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시스템이, 매트릭스가 작동하는 대로 그런 일을 태연하게 저지르는 거죠. 그러니까 자유 박탈은 인간에게 비인간화, 몰개성화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 박탈 가운데 가장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자본주의사회에서 공간도 등질적인 공간으로 바꾸고 시간도 등질적인 시간으로 만들어 생명의 시간 가운데 자연의 시간을 죄다 없애 버리고 모두 인공의 시간으로 바꿔 버린 겁니다. 전체 우주 체계를, 아주 작은 소립자 단계부터 아주 큰 우주까지 전부 등질적인 시공간으로 바꿔서 인간의 의식 속에서만 형성되고 합의되는 세계, 수학 공식을 통해서 확정된 세계를 진짜 우주로 감쪽같이 바꿔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천체물리학이나 수학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이 덫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것이 흰 공간이 됐든, 무한히 확산되는 공간이 됐든, 날마다 해가 뜨고 지는 공간이든, 달이 차고 기우는 시간이든, 지구가 해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시간이든, 사람의 의식 속에서 가공되는 시간은 잘라 내는 기준에 상관없이 내용을 채우는 것들은 다 빼 버립니다. 그래야 계산할 수 있고, 측정할 수 있습니다.
아날로그화 된 세계, 이어진 연속체는 늘 무규정성이 들어가 있어서 이게 이렇다, 저게 저렇다 딱 잘라서 수치화되지 않기 때문에 끊어 낼 수가 없습니다. 측정 가능한 것, 수치화된 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도시사회에서 삶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도시사회에서는 저마다 살아가는 삶을 인간끼리 통제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길이 없습니다. 이렇게 통제하는 세계에서는 맨 밑바닥에서 맨 위까지 위계질서가 반드시 성립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맨 위에는 빅브라더가 있고 맨 아래에는 노바디(아무것도 아닌 사람)로 위계질서가 생깁니다.(이런 위계질서 세우는 작업을 우리 왼쪽 뇌가 맡습니다. 분석하고 조직하는 일은 왼쪽 뇌에서 하는데, 인간 수컷들이 ‘반편이’들이거든요. 언어와 추론을 하는 중추가 왼쪽 뇌에만 몰려 있어요. 여자들은 이야기할 때 양쪽 뇌가 작동하지만 남자들은 한쪽 뇌밖에 작동하지를 않아요. 그래서 수컷들은 조직하면 주욱 늘어서고, 정치 이야기하면 정신을 못 차립니다.)
어쨌거나 자율성이란 것은 생명의 시간 속에서만 싹 트고 꽃 피고 열매 맺습니다. 생명의 시간은 자연계에 있는 여러 생명체가 함께 살아갈 때 가장 도드라지게 드러나게 됩니다. 지나가다 우연히 보게 되는 강아지풀도 누가 언제 싹 터라, 꽃 피워라, 열매 맺어라, 이렇게 명령하고 간섭하고 통제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연스럽게 싹 트고 꽃 피고 열매 맺고 죽을 때는 알아서 죽고 또 땅에 묻힙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가장 경계했던 말이 있습니다. 히브리스hybris, 오만이라는 뜻이죠. 현대 도시에서 디지털화된 시간, 시 단위로, 분 단위로, 초 단위로 끊어 낸 인간의 시간, 공간화된 시간은 인간의 오만이 극대화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유전자조작을 해서 하느님 흉내를 내죠? 생명체를 자기 마음대로 변형시킬 수 있다고 믿고, 사기도 치죠? 사람 장기를 대신해서 돼지 장기로 마치 프랑켄슈타인처럼 몸 전체를 잘라 내고, 잇고, 기워도 끄떡없다고 여깁니다. 돼지 장기를 사람 몸에 궤맞추면 사람이 돼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왜 못 하는지 몰라요. 물질 체계에서는 상호 교환이 가능하고 가역성이 성립되지만, 생명계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물질과학에 기초를 둔 생명공학자들은 생체 조직과 물질 조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장기이식이라든지 유전자조작이라는 것이 정말 아무 문제가 없는지에 대한 것은 여러 세대를 거쳐서 지켜봐야 합니다.
저한테 누군가가 그런 질문을 합니다. 장기 기증하지 않을 거냐고. 제가 착해 보이는 모양이에요.(일동 웃음.) 저는 자신이 없다고 그랬습니다. 저도 저 자신을 못 믿는데 만일 안구를 기증해서 어떤 사람 눈을 번쩍 뜨게 만들면, 그 사람이 어느 순간 누구에게 갑자기 심한 증오심을 느껴서 칼로 푹 쑤셔 살인죄를 저지를지 어떻게 알아요? 장기이식을 받은 사람이 꼭 그것을 고맙게 여기고, 착하게만 살라는 법 없잖아요. 제가 보기에는 기증된 장기를 나쁘게 쓰려고 준비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아요. 지금은 전 세계가 장기이식 시장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있는 나라, 있는 사람들은 없는 나라, 없는 사람 눈알도 빼고 콩팥도 빼는데 혈안이 돼 있는 세상입니다. 죽을 때 기증한 장기가 꼭 성냥팔이 소녀한테 가라는 법 없잖아요. 제가 죽어서 장기 기증하겠다고 하면 착하단 말을 들을 줄 알고 있지만, 이미 죽은 사람에게 착하다는 칭찬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안식교 사람들은 수혈과 헌혈을 안 하잖아요. 그것을 이기적인 동기와 종교적인 편견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전엔 저도 걸핏하면 수혈하고 헌혈하고 그랬어요. 하지만 나중에 비(B) 형간염에 걸린 다음부터는 자꾸 간염 걸린 흔적이 복제되는 게 있어서 헌혈해도 그 피 버리게 된다고, 적십자병원에서 하지 말라고 연락이 온 뒤로는 그만두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가 어떤 일을 했을 때 사회가 전부 그것이 옳다고 해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사회가 전부 그르다 하더라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정말 내가 이 일을 받아들이는데 내적인 확신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여러분들이 자기 몸과 마음을 자율적으로 이용하고, 상황과 체제에 맞서서 자유로운 공간과 시간을 열어 가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시간을 인공의 시간으로 바꿔치기하려는 모든 통제에 대해서 의심하는 눈길을 거두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 말고 ‘무엇을 할 것인가’ 다시 물읍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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