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결한 집
1
새벽빛이 창을 통해 집 안으로 비스듬히 스며들었다. 창이 큰 거실은 주위가 제법 밝았다. 거실 내부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밝고 온화한 벽지 색상이 검소하면서 단아한 가구들과 잘 어울렸다. 나무 무늬 장판은 왁스로 광을 낸 듯 반짝였다. 거실과 이어진 부엌은 어두웠다. 창이 작은 탓이었다. 사물이 겨우 보이는 부엌에서 소년이 상체를 약간 숙인 자세로 무언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볼이 푹 꺼져 있었고, 안색이 창백했다.
소년이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호두나무로 만든 칼꽂이였다. 거기에는 네 개의 칼이 꽂혀 있었다. 과일 깎는 칼과 빵 써는 칼, 육류와 생선 자를 때 쓰는 칼, 식재료를 얇게 저밀 때 쓰는 칼이었다. 소년은 과일 깎는 칼을 뽑았다. 칼날이 얇았다. 소년은 고개를 뒤로 약간 젖히면서 눈을 감았다. 사과를 깎는 어머니의 흰 손이 보였다. 어머니의 흰 손은 우아했다. 우아한 어머니의 흰 손에서 사과 향기가 피어올랐다. 소년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오르면서 창백한 안색이 발갛게 변했다.
향기로운 시간은 짧았다. 향기가 흩어지면서 어머니의 흰 손이 거무스레하게 변해갔다. 소년의 안색이 다시 창백해지고 있었다. 너, 맞아야겠다. 어머니의 차가운 목소리가 소년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젯밤 소년은 자정이 넘어서 집에 들어왔다. 학원은 10시에 마치고, 학원에서 집까지는 20분 남짓 걸린다. 그러니까 평소보다 두 시간이나 늦게 집에 들어온 것이다. 어머니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토록 늦은 것은 처음이었다.
소년은 어머니에게 꿈이었다.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살기 위해 집을 나간 날 저녁, 술에 취한 어머니가 소년의 뺨을 어루만지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넌 나의 별이라고 말했을 때 소년은 자신이 어머니의 꿈이 되었음을 알았다. 아홉 살 때였다.
소년에게 꿈이란 밤하늘의 별처럼 멀리 있어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자신이 밤하늘의 별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황홀했다. 자신의 존재가 고귀해지고 커진 것 같았다. 그런 느낌은 소년이 지금 이곳을 떠나 더 깊고 더 높은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느낌으로 이어졌다. 그 순간 아홉 살 소년의 눈앞에 떠오른 것은 영화 「스타워즈」의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였다. 그는 광선검을 들고 누군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다스 베이더였다. 암흑의 핵심이며, 루크 스카이워커의 아버지이기도 한 다스 베이더가 떠오르자 소년의 황홀은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아버지는 집을 나가기 전까지 어머니와 자주 싸웠다. 싸움이 시작되면 소년은 자신의 방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그들의 싸움은 격렬했다. 그들이 내지르는 소리가 바늘처럼 귀를 찌르는가 하면, 망치가 되어 뇌를 때렸고, 날카로운 이빨로 변해 살을 물어뜯었다. 듣지 않으려고 어머니가 사준 헤드폰을 썼지만 금방 벗었다. 들리지 않는 소리가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소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어머니가 머리로 벽을 찧는 소리였다. 벽이 쿵쿵 울렸다. 세상이 지옥 같았다. 그런 고통 속에서 소년은 아버지를 수없이 죽였다. 아버지는 아무리 죽여도 다시 살아났다. 다시 살아나는 아버지 앞에서 살의와 죄의식을 동시에 느꼈다.
어머니가 소년에게 기대한 것은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다. 어머니는 바깥으로 잘 나가지 않았다. 외부 활동을 일절 하지 않았고, 친척이나 친구도 거의 만나지 않았다. 이웃집 사람과 만나는 것도 피했다. 아들 뒷바라지에만 정성을 쏟았다. 소년은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했다. 초등학교 졸업식 때 전교에서 상을 가장 많이 받았다. 중학교 3년 동안 성적 우수상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영어경시대회 등 전국 규모의 대회에서 여러 차례 상을 탔다. 소년은 어머니를 만족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소년에게 금지된 단 한 가지 행위는 어머니를 실망시키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한 번도 만족한 적이 없었다. 넌 더 잘할 수 있어. 넌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애가 될 거야. 똑같은 말을 언제나 처음 하는 듯한 표정과 목소리로 했다. 그런 어머니가 무서워지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다. 자신의 꿈과 어머니의 꿈이 다르며, 그동안 자신의 존재가 어머니의 꿈에 의해 훼손되어왔다는 느낌에 사로잡히면서 성적이 뚝뚝 떨어졌다.
소년의 어머니는 경악했다. 성적표를 갈기갈기 찢었다. 벽에 붙여놓은 서울대 전경 사진도 갈기갈기 찢었다. 종아리에 피멍이 들도록 때렸다. 솜바지를 입히고 골프채로 엉덩이 살이 찢어질 때까지 때렸다. 밥을 주지 않았고, 잠을 못 자게 했다. 전국 모의고사 등수가 8천 9백 등이었을 때는 성적표를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다가 혼절했다. 소년은 무서웠다. 어머니도 무서웠지만, 어머니로부터 버림받는 것이 더 무서웠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을 때는 어머니가 있었지만, 어머니에게마저 버림받으면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는 세계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다음번 모의고사 등수는 7천 2백 등이었다. 그것을 3천 8백 등으로 바꾸었다. 그 이후 소년의 성적은 가파르게 상승했다. 3천 8백 등이 1천 2백 등으로, 7백 등으로, 4백 등으로, 250등으로, 150등으로 이어지더니 지난주에는 마침내 두 자리 숫자인 67등으로 올라섰다. 너는 머지않아 1등이 될 거야.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소년을 껴안았다.
성적을 조작하는 동안 언젠가는 어머니에게 들키고 말 거라는 두려움이 늘 따라다녔다. 그것은 때때로 목이 졸리는 듯한 느낌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공기가 희박한 곳에서 숨을 쉬는 듯한 느낌으로도 나타났다. 그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시체놀이였다.
시체놀이는 어떤 소녀가 가르쳐준 것이었다. 그 소녀의 이름은 명희였다. 소년이 명희를 처음 본 곳은 학원 건물 옥상이었다. 11월이었고, 해가 질 무렵이었다. 수업 중에 슬며시 나와 옥상으로 올라갔다. 성적 조작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음이 무척 불안할 때였다. 갖가지 생각과 감정 들이 뒤엉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차가운 바람을 쐬면 좋아질 것 같았다. 문을 열고 옥상으로 들어서는 순간 멈칫, 했다. 날씨가 쌀쌀해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여자아이가 있었다. 소년이 놀란 것은 여자아이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아이가 취하고 있는 모습 때문이었다. 여자아이는 난간 위에 누워 있었다. 9층 건물이니 난간에서 떨어지면 죽거나 크게 다칠 것이다. 폭은 넓지 않았다. 누워 있는 몸이 난간을 거의 채우고 있었다. 그럼에도 편안해 보였다. 나지막한 평상 위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편안하게 보이는 것은 고요함 때문이었다. 누워 있는 몸은 고요했다. 너무 고요해 난간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소년은 옥상 한 귀퉁이에 가만히 앉았다. 소리를 내면 안 될 것 같았다.
해가 넘어가면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소년은 주홍빛 색채가 저문 하늘로 스며드는 광경을 꼼짝도 않고 지켜보았다. 난간에 누워 있는 여자아이도 노을빛에 싸이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떠오르고 있었다. 멀리서 희미하게 떠오르고 있는 것은 두 개의 해였다. 하나는 흰색이었고, 다른 하나는 붉은색이었다. 두 개의 해가 노을이 깔린 하늘에 비스듬히 떠 있었다. 어디선가 보았던 풍경 같은데,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해가 두 개니 실제의 세계일 리 없다. 꿈에서 본 풍경일 거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이상했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여자아이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어나기는커녕 움직임조차 없었다. 정물을 보는 것 같았다. 소년은 발소리를 죽이며 난간으로 다가갔다. 여자아이의 검은 패딩 점퍼가 노을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눈을 감고 있는 얼굴에 냉기가 느껴졌다. 꼭 죽은 사람을 보는 듯했다. 안색도 푸르스름했다. 머리칼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여자아이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소년이 주춤주춤 뒷걸음을 치고 있을 때였다. 여자아이는 두 손을 맞잡고 깍지를 끼더니 상체를 일으키면서 가벼운 동작으로 난간에서 내려왔다. 소년은 여자아이를 멍하니 보았다. 묻고 싶은 말들이 많았으나 혀가 굳어버린 것 같았다.
“너 좀비야?”
눈을 가늘게 뜨고 소년을 쳐다보던 여자아이가 툭, 말을 뱉었다. 목소리가 가늘고 맑았다. 가벼운 어지럼증이 일었다. 그 여자아이가 명희였다.
명희가 시체놀이에 빠져든 것은 키우던 애완견이 죽고 나서였다. 애완견의 이름은 지우개였다. 왜 그런 이름을 지었느냐는 소년의 물음에 명희는 자신을 지워주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알 듯 모를 듯한 말이었다. 명희는 지우개가 죽어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경련이 시작되면서 네 개의 다리가 뻣뻣해지고,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고, 입과 코에서 녹색 거품이 흘러나오고…… 개는 죽어가면서도 명희를 보면서 꼬리를 흔들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고 했다.
“이 세상에 지우개 외에 나를 지울 수 있는 존재는 없어.”
명희는 바짝 마른 눈으로 소년을 응시했다.
“그러니 어떡해? 내가 지우개가 되는 수밖에.”
명희에게 지우개가 되는 방법이 시체놀이였다.
“혼자 있는 곳이어야 해. 약간 어두운 데가 좋아. 그렇다고 아주 캄캄하면 안 돼.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다음 팔을 편하게 펴고 눈을 감아. 그러곤 마음의 눈을 떠야 해.”
“마음의 눈?”
“그래, 마음의 눈. 그 눈을 뜨면 몸 안이 어렴풋이 보여.”
몸 안은 어둡고 텅 빈 동굴 같다. 사방이 막힌 그곳에 바짝 마른 새 한 마리가 있다. 윤기를 잃은 날개가 앙상하다. 허공에서 흰 손이 내려온다. 빛으로 이루어진 손이다. 빛의 손은 가슴에 구멍을 뚫는다. 몸속으로 쑥 들어오는 빛의 손을 느낀다. 피가 몸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몸이 차가워지기 시작한다. 차가움은 발에서부터 무릎, 배, 가슴으로 천천히 올라온다. 감각이 희미해지면서 맥박이 느려진다. 죽음은 그렇게 찾아온다고 명희가 말했다.
“죽음과 함께 동굴의 문이 열려. 문이 열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신비로운 소리야. 동굴의 문이 열리면……”
명희는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동굴에 갇힌 새가 날아가. 창공으로.”
“몸 안에 왜 새가 있어?”
소년은 머뭇머뭇 물었다.
“나의 근원이니까.”
“근원?”
“그래, 근원. 근원은 누구에게나 있어.”
“나에게도 근원이 있겠네.”
“물론이지.”
“내 몸 안에도 새가 있단 말이지.”
소년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건 몰라.”
“모른다니?”
“근원의 모습은 사람마다 달라. 나에게는 새의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너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몰라.”
“나의 근원은 왜 나타나지 않지?”
“네가 찾지 않았으니까.”
“어떻게 찾아?”
“네 안을 들여다봐야지. 그냥 들여다봐서는 안 돼. 깊숙이, 아주 깊숙이 들여다봐야 해. 자신이 누구인지 잊을 때까지.”
“네가 지우개가 된다는 게 그런 뜻이었구나.”
소년의 말에 명희는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옥상 난간은 위험해.”
명희는 해질 무렵이면 옥상 난간에 자주 올라갔다. 그럴 때마다 소년은 가슴을 졸이며 지켜봐야 했다.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았다.
“옥상 난간은 새가 창공으로 잘 날아갈 수 있는 곳이야.”
“떨어지면 죽어.”
“난 죽지 않아.”
명희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왜냐하면……”
명희의 눈이 흐려지고 있었다.
“내 근원이 새니까.”
명희의 청명한 목소리가 소년의 귓전에 오랫동안 맴돌았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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