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는 진화한다
격변이다. 20세기 후반 디지털 문명이 엄습한 지 30여 년 만에 세상이 뒤집어지고 있다. 한 가지 학문이나 기술에만 매진하여 경력을 쌓고 전문가로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국경과 언어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학제 간 경계도 허물어지면서 융합과 복합을 통한 새로운 사회 질서의 도래를 앞둔 이른바 혼돈기다. 전문가도 자신의 전문성을 의심하면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모든 정보는 인터넷에 다 있다?
우리나라에서 전문가를 자처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공부하고 연구하는 데 필요한 전문 정보가 인터넷에 널려 있다고 여긴다. 인터넷에 한번 빠져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정보를 찾아 헤매는 과정은 허상을 좇는 시간과의 한판 싸움과 같다. 늦은 저녁 조용한 연구실에서 혹은 집에서 마음먹고 자신의 전문 분야와 관련된 정보를 찾기 위해 인터넷에 접속한다고 치자. 몇 분 지나지 않아 초심을 잊어버린 채 하이퍼링크의 유혹에 이끌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연예인의 일상이나 시답잖은 가십 기사를 클릭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학술정보를 제공하는 구글 스칼러에 접속했다고 능사는 아니다. 키워드 몇 가지를 넣었을 뿐인데 엄청나게 쏟아지는 데이터의 홍수에 떠밀려 자신이 진정 원하는 정보를 발견했는지조차 알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른다. 그때 느끼는 허탈함은 정보 조사에 필요한 시간을 줄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결국 부실한 정보만 자신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 이는 곧 연구의 부실로 이어질 수도 있다.
효과적으로 전문 지식과 정보를 얻으려면 이제 정보를 입수하는 방법도 효율적으로 바꿔야 한다. 인터넷은 아예 가십 기사를 즐기거나 게임을 하는 친구들을 만나는 곳으로 정하고, 연구개발 혹은 논문 작성 등에 필요한 정보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자. 그 전문가가 바로 사서다. 사서와 협력하는 것이야말로 정보를 더 효율적으로 활용해 자신의 식견과 짓기에 깊이를 더할 수 있는 21세기형 전문가의 생존법이다.
사서는 전문가들에게만 유익한 존재가 아니다. 공공도서관의 사서는 일반 시민들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자료를 제공해 줄 수 있다. 아이의 진로에 대한 고민, 퇴직한 중장년층의 창업 준비, 부부관계 개선, 귀농 준비 등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학교도서관 사서는 학생들의 자기주도학습을 이끄는 교사 역할을 하고 국회도서관의 사서는 우리나라 국회의원의 의정 활동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다.
대출대에 오도카니 앉아서 이용자들에게 책을 대출해 주고 반납된 책을 다시 제자리에 꽂는 사람이 사서가 아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세계 무대에서 자신의 창의성과 실력과 연구를 검증받는 데 필요한 지적 탐구의 동반자이며, 일반이들이 지적 호기심을 채울 수 있도록 방향을 알려 주는 안내자다.
안타깝게도 국내에서는 아직 사서의 일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같다. 대학도서관만 봐도 그렇다. 우리나라의 명문 대학들이 닮고 싶어 하는 하버드, 예일 등 이른바 미국의 아이비리그 대학들은 70여 개의 대학도서관을 캠퍼스 내에서 운영하고 있다. 각 단과대학별로 전문도서관을 운영하며 전문적인 정보를 연구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인 서울대 도서관도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 세계 10위권 내에 들어가는 대학이 우리나라에 없는 원인을 도서관의 비전문성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수적인 열세는 차치하고라도 서비스의 질에도 차이가 있다. 한 나라의 미래가 교육의 질에서 비롯되듯 교육의 질은 도서관의 장서 규모와 서비스의 질에서 비롯된다.
진화하는 사서
전 세계 도서관의 책 1000만 권을 스캐닝해서 디지털도서관을 만드는 '구글 북스 라이브러리 프로젝트'가 완료되고(2004년에 시작됐다) 나노 기술의 발전으로 접는 모니터가 상용화되어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나왔던 장면들이 현실화되면, 사서라는 직업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섣부른 예단을 한다. 누구나 정보를 찾을 수 있는데 굳이 사서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에서 시작된 발상이다.
그러나 인간이 지식을 습득하고 체화해 이를 근거로 창의력을 발휘하는 일련의 인지 과정은 디지털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다. SNS나 블로그 등을 통해 단편적인 지식을 습득한다고 해서 고도의 창의력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전문가에 의해 검증됐다. 미국 터프츠대학의 매리언 울프Maryanne Wolf 교수는 자신의 저서 『책 읽는 뇌Prust and the squid』에서 책을 읽는 동안 사람의 뇌에서는 상상을 할 때와 같은 기저가 작동한다고 했다. 책에 빠져들면 인간의 뇌가 상상에 빠지고 상상에 빠지면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된다.
한편 새로운 이론을 개발하고 첨단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선행 연구 과정을 꼼꼼하게 익히고 그 위에 새로운 이론을 쌓아 올려야 한다. 선행연구의 과정을 충실히 하지 않는다면 최종 연구 결과의 독창성이나 근거를 확신하기 어렵다. 혹은 선행 특허 조사를 하지 않은 채 연구를 수행하여 기껏 개발한 연구 결과가 기존 특허에 걸려 세상 빛을 보지도 못하고 문서로만 남게 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아날로그 시대보다 더 많은 데이터가 쏟아져 나온다. 정보생산권이 이용자에게로 넘어간 후 블로그, SNS 등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1초에 수억 건의 데이터가 생산되고 있다. 이른바 빅데이터 시대다. 데이터를 분석해 이용자들의 마음까지 파고드는 기술이 연구되고 있는 요즈음, 사서의 역할은 시대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
더불어 사서의 업무는 더욱 세분화될 것이다. 유구한 역사를 거쳐 오면서 생성된 고문헌을 다루는 사서는 보존과 이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분발해야 할 것이고, 공공도서관은 공공재로서의 도서관을 더 풍성하고 견고하게 강화해야 한다. 더불어 디지털 시대에 필요한 디지털정보의 활용 면에서도 사서의 역할은 특화되어 디지털 관련 전문 지식을 습득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정보서비스를 끊임없이 개발해야 한다.
인간에게 물은 생존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지만 홍수 등 큰 물은 재앙이 되어 엄청난 피해를 준다. 마찬가지로 21세기에 정보는 일상을 영위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지만 범람하는 정보는 24시간이라는 정해진 하루를 살아가는 인간을 더욱 피폐하게 마든다. 그렇다면 적절하게 정보를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서의 역할은 21세기에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희귀본을 소장하고 있는 하버드대학 휴턴도서관의 사서 매튜 배틀스Matthew Battles는 그의 책 『도서관, 그 소란스러운 역사Library: An unquiet history』에서 종이와 잉크에서 픽셀과 비트로 형식이 바뀌었지만 도서관은 여전히 말을 담고 있는 책을 관리하면서 과학기술, 변화의 힘, 시간과 맞서 싸워 왔으며 변화는 끝없이 순환하는 재생 과정의 일부라고 했다. 또 디지털 시대의 사서도 신의 계시를 수탁 관리하던 중세의 조상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했다. 이용자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관리해 제공하는 사서의 미션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만 시대에 따라 정보를 수집하고 관리하고 제공하는 형식과 방식이 바뀔 뿐이다.
사서의 전망은 밝다
그렇다면 직업인으로서 사서의 미래는 어떨까? 과거처럼 '수서와 편목 그리고 목록작업에만 능숙하면 전문적인 사서'라고 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물론 수서와 편목, 목록작업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사서의 역할을 부각시켜 보자는 의미다. 정보의 형태도 아날로그인 책이나 저널 등에서 전자책, 전자저널 등 디지털 형태로 바뀌고 있고 단말기의 발전 속도도 빨라지면서 조만간 디지털정보는 종이책보다 이용률이 높아질 수도 있다. 단말기의 발전 속도에 빠르게 적응하는 디지털 네이티브라면 이미 종이책보다 단말기를 통한 정보 입수가 더 편리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사서의 주요 업무 중에 정보서비스 부문이 앞으로는 더욱 부각될 것이다. 사서는 이용자가 원하는 정보의 형태에 상관없이 정보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모바일 기술, 데이터베이스 구축 기술 등 IT기술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추고 디지털도서관을 마치 제 집 드나들듯 하며 갈고리로 정보를 긁어모아 이용자들에게 적확하게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전문가로서의 사서의 미래다. 더불어 수집한 정보를 분석하는 능력을 갖춘다면 어떤 조직에 있든 사서의 역할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한편 학제 간 융복합의 시대인 21세기다. 문헌정보학도 예외일 수는 없다. 애초부터 문헌정보학은 융복합의 성격이 짙어 학과를 대변하는 단어 중에 intermediary, 즉 '중개'가 빠지지 않았다. 출판사와 DB 유통사와 정보를 중개하면서 정보를 더욱 알차게 수집하고 이용자에게 더 나은 정보를 제공하는 일이 사서의 미션이라는 의미다. 급변하는 시대에 사서와 문헌정보학 관계자들은 더욱더 본연의 성격을 부각시켜야 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세계적으로 저명한 사서는 아직 국내에서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대신 한국인으로서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사서들은 많다. 지난 2011년 세상을 떠난 박병선 박사가 대표적이다. 1967년부터 프랑스국립도서관 사서로 일했던 그는 외규장각 도서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것을 국내로 반환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또 1972년에는 『직지심체요절』의 존재를 우리나라에 알리기도 했다. 하버드대학 하버드옌칭도서관 한국관에서 장서를 개발했던 김성하, 윤충남 사서도 해외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한국 사서다.
사서의 전문성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서는 절대 생겨나지 않는다. 이제 사서는 스스로의 전문성을 외부에 알리며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해 부단히 연구해야만 한다. 그 결과 이 책에 등장하는 이용훈 서울도서관 관장처럼 도서관문화비평가가 될 수도 있고, 임미경 이사관처럼 고위 행정가가 될 수도 있고, 임근혜 사무관처럼 아키비스트가 될 수도 있고, 이재준 장서각 사서처럼 고문헌 전문가가 될 수도 있고, 강미경 하버드옌칭도서관 사서처럼 한국학 장서개발자가 될 수도 있다. 공통점은 모두 전문가라는 것. 전문가로서의 사서의 역할은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사서는 우리 가까이에 있는 '책 의사'
도서관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그리고 사서는 책을 매개로 도서관을 찾는 이용자들에게 정보서비스를 하면서 동시에 그들과 의사소통을 한다. 때로는 상담사가 되어 인터넷에 빠져 섬처럼 고립된 사람에게 다양한 정보서비스를 제공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고 심리학과 연계해서 도서관 이용자를 위한 상담서비스를 개발하거나 경영학과 연계해서 마케팅 노하우를 연구하기도 한다.
또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듯 사서는 책을 통해 사람들을 치유하는 '책 의사' 역할을 하기도 한다. 왕따 혹은 학교 폭력 등으로 괴로워하는 학생들에게 책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방법을 알려 주고, 실직으로 앞길이 막막한 중장년에게 새 일을 준비할 수 있는 책을 권해 주고, 꾸준히 자기계발을 하는 직장인에게 비타민 같은 정보를 추천해 주고, 스스로 인생을 헛되이 보내고 있다고 우울해하는 전업주부에게 인생의 의미를 찾는 법을 알려 줄 수도 있다.
미래는 사람이 주인인 사회다.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방법을 도서관에서 찾을 수 있도록 도서관은 끊임없이 변신해야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사서는 서비스업 종사자라는 마음 자세를 잊어서는 안 된다. 도서관의 존재는 사회 구성원을 위해 정서적, 지적 서비스를 하는 곳이라는 비전을 굳건히 하며, 그것을 근거로 하여 이용자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서비스를 해야 한다. 도서관 서비스로 이용자들의 삶이 바뀌고 나아가 사회가 바뀔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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