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 역사는 픽션인가
일자 : 릭, 내가 얘기 하나 해줄까요?
릭 : 결말이 흥미진진한 이야기인가요?
일자 :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나도 아직 몰라요.
릭 : 그래요, 해봐요.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좋은 결말이 떠오를 때도 있으니까.
일자 : 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예요. 그녀는 오슬로에 사는데, 방금 파리에 도착했죠.
_영화 <카사블랑카>에서 잉그리드 버그만과 험프리 보가트의 대사
그들(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유럽문화가 인식론적 혼란 상태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백인이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어야 할지, 무엇을 폐기하고 무엇을 보존해야 할지 구분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백인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킬 줄 모른다는 것이다.
_데보라 버드 로즈Deborah Bird Rose, 『숨겨진 역사Hidden Histories』 (1992)
역사란 무엇인가? E. H. 카E. H. Carr는 1961년에 초판이 발행된 이후 지금까지 끊임없이 재판再版을 거듭하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에서 이와 같이 물었다. 우리의 질문은 좀 더 제한적이다. 역사는 허구fiction인가? 그러나 역사는 허구인가, 라는 질문도 알고 보면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 같은 답을 찾고 있다. 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책에서 역사적 진실의 문제, 역사가와 과거의 관계, 사실과 가치, 해석의 문제에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카와 다른 점은 두 가지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언어와 서술, 상징, 수사법, 풍자를 통해 형성되는 역사의 문학적 측면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문학적 형태와 역사적 진실을 향한 열망 사이의 관계를 카와는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몇 년 전부터 이 책을 준비해왔다. 역사는 허구인가, 라는 책 제목(이 책의 원제는 Is History Fiction이다-옮긴이)을 듣고 난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역사는 물어보나 마나 허구라는 반응이다. 그들은 역사란 역사가가 자신의 시대와 장소에서 바라본 관점에 근거해 창조한 것이며, 동일한 사건이 시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역사가의 새로운 관점에 따라 계속해서 다시 쓰인다고 말한다. 그들은 서구의 폭넓은 역사서술의 전통 안에서 활동하는 역사가들이 내놓는 분석과 서술이 하나의 특정한 세계관, 즉 시간과 인과관계에 대한 ‘유럽식’ 세계에서 비롯된 게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역사를 서술하는 일은 다른 세계관에서 도출된 또 다른 관점보다 진리가치가 더 큰 것도 아니고, 더 적은 것도 아니라고 느껴진다. 그런 역사서술은 스스로 공정하고 과학적이며 객관적이라고 주장하겠지만, 사실은 “이것은 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예요. 그녀는 오슬로에 사는데, 방금 파리에 도착했죠”라고 말하는 <카사블랑카>의 잉그리드 버그만처럼 이야기의 마법으로 독자를 현혹하고 있을 뿐이다.
두 번째 반응도 첫 번째 못지않게 단호하다. 이들은 역사는 허구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역사는 역사이고, 허구는 허구이므로 둘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주로 역사가들 자신)에 따르면, 허구는 어디까지나 발명과 상상의 산물이다. 따라서 허구는 지식을 확신할 수 없게 만든다는 인식에 기초해 역사를 허구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한다. 창작물을 쓰는 작가는 상상력을 자유롭게 발휘하여 캐릭터와 사건, 장소, 심지어 나라까지 만들고, 과거는 물론이고 미래라는 상상 속의 시간을 이야기의 배경으로 삼기도 하지만, 역사가에겐 그런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다. 역사가는 서류와 그림 자료를 비롯해, 물건, 녹음된 소리, 건물,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문서와 시각자료, 그리고 유물 등 자신이 가진 자료에 꼼짝없이 묶여 있다. 역사가는 그런 자료를 정밀하고 꼼꼼하게 추적하고 분석하지만, 설사 그러한 자료에 결정적 정보가 빠져 있다 하더라도 상상을 통해 그 빈틈을 메우거나 과거를 복원한 다음 그것이 역사라고 주장할 수 없다. 반대로 정보가 넘쳐난다면, 역사가는 관련성과 표현이라는 원칙을 엄격히 적용해 정보를 취사선택해야 한다. 물론 대부분의 역사가는 자신의 해석에 의존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지금 가지고 있는 증거를 바탕으로 최선을 다해 과거를 복원할 의무가 역사가에게 있다고 강조할 것이다. 수년씩 시간을 투자하며 꼼꼼히 자료를 조사하는 역사가들은, 역사를 업으로 삼지 않는 사람들이 역사는 허구라는 말을 너무나 쉽게 내뱉을 때마다 분통이 터진다.
세 번째 반응을 보인 사람이 가장 많았다. 그들이 보인 반응은 “글쎄요… … 역사가 허구인가요?”다. 우리가 “한편으로 그렇고, 또 한편으로 그렇지 않다”라고 답하면 그들은 어정쩡하게 양다리 걸치지 말고 역사의 진실이나 역사의 문학적 측면, 혹은 현재에 얽매인 역사의 속성 가운데 어느 한쪽의 손을 분명하게 들어보이라고 우리에게 요구한다. 역사는 허구인가, 라는 질문은 우리에게도 대단히 복잡한 답을 요구한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책 한 권 정도의 분량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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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역사가는 과거에 대해 진실을 말할 수 있을까? 역사는 현재의 입장에서 혹은 현재를 위해 쓰여야 하는 것일까? 과거를 오롯이 당시의 상황에만 비추어 바라보는 게 가능할까? 우리는 과거의 사람과 행동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려야 할까? 역사는 서술의 관행에 의해 형성되므로 역사의 의미는 과거 그 자체보다는 서술의 형태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닐까? 이는 결코 어제오늘 제기된 질문들이 아니다. 역사를 어떻게 써야만 하고, 자신들이 쓰는 역사가 얼마나 진실한지에 대해 역사가들의 의견이 일치한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역사가들이 역사적 진실이라는 문제를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해왔고, 역사적 진실을 쟁취하는 방식에서 역사가들이 저마다 어떻게 매번 그토록 뚜렷한 차이를 보여왔는지 드러내는 것이 이 책의 목표 가운데 하나다. 그 뚜렷한 차이는 서구 역사서술의 창시자로 불리는 헤로도토스Herodotus와 투키디데스Thucydides의 위대한 저작들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들이 각각 『역사The Histories』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를 통해 남긴 개별적이면서도 서로 연결성을 지니는 유산은 고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논쟁거리를 제공해왔다.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의 차이점과 유사점은 역사서술의 탄생이라는 문제와 역사적 질문의 초점을 어디에 맞추는 게 적절한가의 문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역사연구의 초점은 국가의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 영역과 활동에 맞추어야 하는가? 아니면 흔히 전쟁과 위기에 초점을 맞춰 설정되는 기간보다 더 긴 기간을 대상으로 일상적이고 사회적이며 문화적, 종교적, 성적인 영역에까지 훨씬 폭넓은 시선을 던져야 하는가?
현대에 들어 이런 논쟁의 준거점이 된 것은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가 1820년대에 제시한 선언문과도 같은 유명한 문구다. 이 문구는 시대를 초월해 변함없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역사가란 과거를 “실제로 그것이 어떠했는가를wie es eigentlich gewesen” 보여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서술에 관한 랑케의 이와 같은 시각은 현대 역사학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너무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랑케의 놀라운 결과물을 토대로 3장에서 이를 살펴보려고 한다.
우리는 ‘역사는 허구인가?’라는 질문이 상당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것은 아마도 역사와 역사가에 대한 공개적이고 법적인 검증이 철저해짐에 따라 “무슨 일이 일어났었지?”라는 근본적이면서 해묵은 질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그만큼 커졌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는 공개 토론의 소재가 되는가 하면, 과거를 바라보는 역사가들의 관점 차이가 주요 정치적 논쟁과 토론을 촉발시키면서 최근 몇 년 사이에 많은 사회에서 불안의 근원으로 자리 잡았다. 때로는 이른바 전시戰時의 잔혹행위가 역사를 둘러싼 논쟁의 주제로 떠오르기도 했다. 일본의 난징대학살, 미국의 에놀라 게이Enola Gay(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 미국 B29 폭격기의 애칭–옮긴이)와 히로시마 원폭투하가 그런 논쟁의 좋은 예다. 또한 영국인이 식민지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폭력의 정도를 놓고 불거진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전쟁history wars’처럼 국가의 근본적 토대에 의문을 제기하는 논쟁도 있다. 이와 같은 논쟁에서 민족주의 역사가들은 국가의 과거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통해 자국이 저지른 행동을 정당화하고 찬양하려는 시도를 한다. 반면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자국의 역사적 신화에 의문을 제기하며 국가의 어두운 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주장한다. 예컨대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유럽인들이 정착 사회를 세우는 과정에서 원주민들에게 폭력과 약탈, 학대, 심각한 정신적 충격을 가했다고 서술한다. 이런 역사서술로 인해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보수적 역사가들로부터 맹비난을 받으면서 스스로 자신의 견해에 문제제기를 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거친다.
식민 지배에서 풀려난 국가에서 벌어지는 공개적 논쟁은 매우 다양한 양상으로 펼쳐진다. 예컨대 남아프리카 공화국 진실과 화해 위원회의 청문회에서는 인종차별 정책이 실시되던 시절의 경험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는가 하면, 하와이에서는 원주민을 쫓아내는 행위와 아시아 이주민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과거는 물론이고 현재까지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국가의 과거에 관한 이와 같은 공개 토론은 역사가에겐 구체적인 압박으로 다가온다. 따라서 ‘역사는 허구인가?’라는 질문도 한층 긴급한 대답을 요구한다. 대중은 역사가의 말이 진리이기를 원한다. 역사가들끼리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거나 끝내 진실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 따위는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대중은 중요한 질문에는 반드시 하나의 정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실이 여러 가지라는 말은 확신을 갖지 못한 채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겠다거나, 역사가의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얘기로 들린다. 절대적 진리에 대한 대중(그리고 학생)의 기대치가 높아지면서 해석과 오류, ‘날조’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다. 공개적인 장에서 토론을 벌이는 역사가들은 역사학의 기초적 문제들, 예컨대 자료는 ‘스스로 말할 수 있다’라든가, ‘사실’과 ‘해석’ 사이의 관계, 역사에서 윤리적 판단의 역할 같은 문제를 둘러싸고 생각보다 역사가들 사이의 분열이 훨씬 더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을 얻기까지 개인적으로 상당한 대가를 치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에 관해선 11장 「역사전쟁」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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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기에 앞서 분명히 해둘 게 있다. 우리는 진실이 분명히 존재하고, 진실을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우리를 포함하여 어떤 역사가라도 자신이 잠정적으로나마 과거의 진실에 다가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면 역사를 공부하거나 역사적 진실을 좇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진실을 객관적으로 규명할 수 있다고 당당히 선언할 수 있는 역사가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연구결과가 과학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객관적이라고 주장하는 역사가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거기엔 항상 의문부호가 따라붙어야 한다. 이러한 역설, 다시 말해 역사의 진실을 찾아야 하는 필요성과 그러한 진실을 찾는 것의 어려움이야말로 우리가 이 책에서 탐구하려는 내용이다.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은 흔히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글쓰기라는 목표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두 사조는 학문과 직업으로서의 역사의 생존을 위협했다. 어떤 책은 『역사 죽이기The Killing of History』라는 제목으로 이 상황을 묘사했다.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사회에 인식론적 현기증을 불러일으키고 따라잡기 힘들 만큼 빠른 지적 호흡을 요구하며 갑작스럽게 사망선고를 내리는 듯하다. 서구의 역사적 담론에 대해, 그리고 언어의 바깥에 존재하는 세계를 직선적으로 언급하는 언어 자체의 능력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은 확신에 찬 어조로(이 부분에 대해 우리가 잘못 판단했을 수도 있지만) 과거는 결코 복원될 수 없고 역사연구라는 것은 불가능하며 역사는 그 자체의 허구에 의해, 다시 말해 역사적 진실이 존재한다는 터무니없는 믿음 아래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의 지속적인 존재와 생존을 위험에 빠트리고 있다고 보는 많은 역사가들은 반反역사적이며 역사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배신행위라며 포스트모더니즘에 공격을 퍼붓는다. 역사가들은 묻는다. 우리가 역사적 설명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다면, 무엇 때문에 굳이 힘들게 시간을 들여 자료를 조사하겠는가? 자료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단 말인가? 우리는 어떤 진실도 찾을 수 없단 말인가?
역사와 허구에 관한 몇몇 문화이론가들의 주장은 위험천만하게도 역사라는 학문의 가치를 완전히 부정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런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자 키스 젠킨스Keith Jenkins의 책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Rethinking History』(1991)에서 젠킨스는 “사회적 관용을 위한 토대, 그리고 차이의 긍정적 인정을 위한 토대”로서 이념이 지니는 중요성이 윤리적 상대주의와 인식론적 회의주의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현재의 역사가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젠킨스의 비유는 걱정스러울 정도로 엉성하고, 심지어 경망스럽기까지 하다. 젠킨스는 “과거와 역사는 서로 수많은 세월과 머나먼 거리를 두고 떨어진 채 각자 떠다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사실과 관련된 단어가 들어갈 자리를 ‘해석을 거치지 않은 최초의 자료’와 그 밖의 ‘온갖 것들’로 채워넣는다. 젠킨스에 따르면, 역사가는 “묘사를 통해 역사를 서술하고 역사가 가지고 있을 법한 의미를 창조한다.” 이는 마치 은근히 과거를 경멸하면서 오로지 현재에만 절대적 지위를 부여하는 듯한 태도이다. 젠킨스는 후속작인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하여On ‘What is History?’』(1995)에서 과거는 “단지 의미와 목적이 부여되길 기다리는 대상”이라고 주장하며 그러한 “과거는 완전히 ‘잡다하게 뒤섞어놓은 과거’로서, 누구에게나 어울릴 수 있는 과거이고, 너도나도 가질 수 있는 느슨한 과거이며, 무엇보다도 그다지 쓸모가 없는 과거”라고 쓰고 있다. 이 대목에서 젠킨스는 과거에 대한 경멸과 혐오에 대해 아주 고루한 성적 비유를 동원한다. 우리는 젠킨스와 같은 극단적 상대주의를 거부하는 한편, 자신의 연구결과와 해석이 절대적 객관성을 획득했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들의 주장 또한 거부한다.
우리가 보기에 역사적 진실을 찾다 보면 상대주의를 거부하기보다는 문화적 특수성과 역사연구에 따르는 불가피한 제약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역사서술에서 허구적 요소를 의식적으로 인정할 때 진실 탐구가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화된다고 생각한다. 역사가는 과거를 재현하는 데 능동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을 숨기지 않으면서 독자가 적절한 의심을 품고 모든 종류의 역사(책, 영화, 비디오, 텔레비전, 박물관 전시, 역사 유적지)에 접근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역사가는 모든 지식을 다 알고 있는 척하지도 않고, 다 알고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역사가는 과거가 마치 어떤 도움이나 매개 없이도 광범위하고 복잡한 방법을 통해 현재 시점에서 발언권을 얻고 있다는 식으로 역사자료를 읽거나 제시하지도 않는다. 문화이론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연결시키고 현재와 과거의 연관성에 대한 자기반영적 인식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역사서술의 가능성을 탐구하겠다는 열망을 품어야 한다.
이 점은 이 책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차지한다. 우리는 방금 말한 역사인식과 역사서술, 즉 다양한 이야기들을 연결시키고 현재와 과거의 연관성에 대한 자기반영적 인식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역사서술이 현대의 ‘포스트모던’ 문학과 철학 이론의 발명품이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기는커녕 그러한 역사인식과 역사서술은 변화무쌍한 인물인 헤로도토스가 서구의 역사서술을 낳았던 바로 그 순간부터 존재했다. 그런 의미에서 헤로도토스를 ‘미완성의’ 포스트모던 역사가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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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문제를 둘러싼 논쟁 가운데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즉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논쟁은 역사라는 큰 그림 속에서 강력한 허구적 요소를 발견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지 보여주는 증거로 종종 언급된다.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역사가들은 홀로코스트부인주의(유대인 대학살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 부인론은 나치의 의도적인 유대인 말살 계획과 가스실의 존재를 부인하며, 2차 세계대전 당시 사망한 유대인도 알려진 것보다 훨씬 적다고 주장한다-옮긴이)에 맞서기 위한 근거를 제거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10장에서 다루겠지만, 이는 물론 부당한 혐의다. 그러나 우리는 홀로코스트처럼 중대한 역사적 사건의 경우 역사가의 연구 활동을 면밀히 검토하고, 홀로코스트의 정치적, 역사적 특수성에 주목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방법론적 원칙은 모든 개념 혹은 관념이 그 자체적으로 생성될 수 있는 독자적 역사와 맥락, 조건을 갖고 있다고 암시한다. 미국 역사가 피터 노빅Peter Novick은 『홀로코스트와 집단 기억: 미국의 경험The Holocaust and Collective Memory: The American Experience』에서 홀로코스트를 위한 전후戰後의 역사를 대문자 ‘H’를 사용하여 하나의 개념으로 정리한다. 특히 그는 미국이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를 거쳐 1960년대 초반까지 지금은 동맹국이 된 전후 독일에 대한 비난을 최소화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여기에 냉전이라는 시대적 상황이 맞물리면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개념이 발전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홀로코스트가 600만 명에 달하는 유럽의 유대인 학살극으로 언급되면서 명확한 개념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였고, 워싱턴 D.C.의 홀로코스트 추모 기념관이 1993년에야 세워진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홀로코스트는 한참 뒤늦게 비로소 미국인의 삶에서 역사적 사건으로 자리매김했다. 노빅은 다양한 정치 조직과 단체가 자신들의 이념적 목적을 위해 홀로코스트를 얼마나 많이 이용해왔는지 지적한다. 노빅의 지적에 따르면, 미국 원주민과 흑인 작가들은 홀로코스트(대학살)가 북아메리카의 식민지 정착 역사에서도 일어났던 사건임에도 오로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서 일어났던 사건으로만 한정지으려는 시도에 반대하며 분노에 찬 비난을 퍼부었다. 노빅에 따르면 1960년대 후반부터 점점 더 많은 미국계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미국에서 피해자 집단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미국 작가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은 이런 유대인들의 인식을 슬프고도 신랄하게 꼬집는다.
미국계 유대인이 자신도 미국 흑인이 당하는 고통만큼 뼈아픈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하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 사실이 그렇지도 않거니와, 그렇게 말하는 미국계 유대인의 목소리에는 자신이 정말 그런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확신이 실려 있지도 않다… … 유대인들이 학살당한 장소는 여기 미국도 아니며, 지금 학살이 자행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곳 미국에서 유대인은 결코 흑인처럼 경멸당하는 존재가 아니다. 왜냐하면 미국계 유대인은 미국인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이 고난을 겪은 곳은 바다 건너이고, 미국은 오히려 그들을 가두고 있는 집으로부터 유대인들을 구출해냈다. 반면에 현재 미국은 흑인들에게 속박의 집이다. 그러나 흑인들을 구출해낼 수 있는 나라는 없다.
이 강력한 글에 나타난 볼드윈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 백인들은 감정이입을 하는 과정에서 미국에서 벌어졌던 대량학살과 잔학행위의 역사를 직면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 백인 국가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 조건이었고, 오늘날까지 백인 국가를 떠받치고 있는 조건인 바로 그 역사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백인들은 자신들의 선조가 저지른 증오를 차마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그 증오는 그들을 오늘날 존재하게끔 만든 증오이고, 사회를 건설하고, 번영시키며, 세계를 지배하려는 시도를 가능하게 한 증오다. 달리 말하면 미국 백인들은 볼드윈이 갖고 있는 비극적 역사인식을 수용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노빅이 보기에 미국인의 삶에서 하나의 관념으로서의 홀로코스트는 결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지도 않고 모두가 동의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홀로코스트는 그 자체의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한 홀로코스트의 역사는 부분적으로 식민주의와 노예제도, 인종차별이라는 미국만의 독자적이고 분열적이며 깊은 상흔을 남긴 역사에 의해 형성되었다.
만약 해석의 여지가 넓게 열려 있고, 역사적 재현과 은유적, 비유적 이해의 가능성이 높은 역사적 사건을 꼽으라면,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홀로코스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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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한 회고와 “형태가 없는 시간에 형태”를 부여하려는 열망은 서구 문화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서구사회에서는 역사적 사유를 피할 수 없다. 우리는 미래와 현재, 과거 사이의 구분을 무시하거나 뛰어넘어 생각할 수 없다. 구조주의 인류학의 창시자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가 언급했듯이, 이러한 역사적 사유가 모든 문화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고, 인류에 필수적인 것도 아니다. 서문 첫머리에서 인용한 인류학자 데보라 버드 로즈에 따르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서구인의 과거관을 상당히 의아하게 여긴다. 대부분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장소와 물건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를 현재의 조건과 전혀 다른 조건에서 이해하고 과거와 현재를 별개로 여기는 사고방식은 그들에겐 참으로 낯설기만 하다.
역사의 서구화는 비非서구인과 비서구사회에 대한 역사를 기술할 때 문제가 된다. 인도 벵골 태생의 역사가 디페시 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rty는 『유럽의 지역화Provincializing Europe』(2000)라는 책에서 인도 같은 나라의 역사를 쓰려고 할 때 부딪치게 되는 문제가 무엇인지 조사한다. 차크라바르티는 역사화化라는 발상 자체가 유럽의 담론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역사화가 환상에서 깨어난 공간과 세속의 시간, 인간의 통치권에 대해 다소 특수한 유럽의 전제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좀 더 세계적인 시각에서 역사를 이해하고 싶다면 유럽식 역사 접근은 여전히 필수적이고 불가피하다. 그렇게 본다면 유럽식 사고는 “우리가 인도의 정치와 역사를 구성하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깊이 있게 살펴볼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필수적인 동시에 부적절하다.” 이와 같은 차크라바르티의 주장은 연구 활동으로서의 역사학이 지닌 특수성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역사의 불가피한 유럽성을 지적하는 과정에서 아쉽게도 이를 지나치게 단순화했다. 그의 주장 속에는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로부터 시작된 서구의 역사서술을 하나로 뭉뚱그리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특히 서구의 역사서술이 필연적이며, 지속적으로 세속성과 이성, 보편성을 추구해왔다고 보는 그의 시각은 위험하다. 인류학자 탈랄 아사드Talal Asad는 더 구체적이다. 그는 『세속의 형성: 기독교, 이슬람, 근대성Formations of the Secular:Christianity, Islam, Modernity』(2003)에서 세속주의와 세속주의의 이성적이고 보편적인 가정을 서구 역사의 구체적 단계, 즉 근대성, 그중에서도 진보주의와 연결짓는다.
역사적 사유는 줄곧 서구의 전통적이고 유대-기독교적 유산에 큰 영향을 받아왔다. 그와 같은 전통적 유산 속에서 역사에 대한 세속적 개념과 종교적 혹은 신화적 개념은 팽팽한 긴장 관계에 놓여 있다. 헤로도토스는 신들이 역사적 사건에 개입한다고 생각했다(『역사』 9권 100장). 그런가 하면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한 직후 스파르타는 놔두고 아테네에만 끔찍한 전염병이 덮친 것은 신의 심판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펠로폰네소스 전쟁사』 1권 23장, 2권 54장). 사막을 탈출해 시나이 산에서 계시를 받는 출애굽기 같은 유대인의 이야기도 역사로 여겨진다. 유대인들은 역사란 예측 불가능한 것, 세상을 통째로 바꿔버리거나 커다란 재앙을 불러오는 것, 이전에 일어났던 사건의 패턴과는 전혀 무관하게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가 수난을 당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부활하는 이야기를 역사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는 서구식 달력에 입각한 시간의 토대이기도 하다. 한 세기와 세기말, 새로운 천년이라는 개념은 이상향과 반反이상향, 예감, 두려움, 희망이라는 풍부한 환영을 수반하며 서구식 달력에 입각한 시간을 주기적으로 부각시킨다.
근대 과학사는 역사를 세속적인 것으로 표현할지 모르지만, 예나 지금이나 유럽과 서구의 역사서술에는 종교적이고 신성하며 신화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탈세속주의적’인 관점을 바탕으로 세속적인 동시에 신성하고 신화적인 시간의 이중성에 대한 서구의 경험과 현상학을 불러낼 것이다. 세속의 시간은 마치 끊어지지 않고 길게 이어진 하나의 직선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 시간은 하나의 물질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간이라는 물질은 신성하고, 신화적이고, 구세주를 연상하게 하고, 예언적이고, 종말론적이고, 천년왕국을 떠올리게 하며, 불가사의 하고,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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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우리가 취한 작업방법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작고한 미국의 문학평론가이자 문명비판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서문에서 사상사에 관한 푸코의 접근방식을 수정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이드가 보기에, 푸코는 마치 사상에는 특정 저자가 없다는 듯 비인격적 담론에 초점을 맞췄다. 그와 반대로 사이드는 사상의 형성 과정에 공헌한 특정한 지적 인격체가 제시한 담론에 초점을 맞췄다. 우리는 이 책에서 사이드의 접근방식을 채택했다.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 월터 스콧 경Sir Walter Scott, 레오폴트 폰 랑케, 액턴 경Lord Acton, J.B. 베리J. B. Bury, 프랜시스 콘포드Francis Cornford, 조지 매컬리 트리벨리언George Macaulay Trevelyan,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 허버트 버터필드Herbert Butterfield,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 라파엘 렘킨Raphaël Lemkin,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메리 비어드Mary Beard, E. H. 카, J. H. 헥스터J. H. Hexter, 미셸 푸코, 거다 러너Gerda Lerner, 헤이든 화이트Hayden White, 애나 데이빈Anna Davin, 실라 로우보덤Sheila Rowbotham,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Natalie Zemon Davis, 로이스 배너Lois Banner, 조앤 스콧Joan Scott, 그리고 다칭 양Daquing Yang 같은 이름은 어찌 보면 역사소설이나 태피스트리에 그려진 그림에나 등장할 법한 이름일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가 『철학이란 무엇인가?What is Philosophy?』에서 그 영향력이 오래도록 지속되는 주요 철학자를 “개념의 페르소나conceptual personae” 혹은 “사상의 형태”라고 불렀듯이, 그리고 한나 아렌트가 『암흑시대의 인간Men in Dark Times』에서 연대기와 일화, 삽화, 사회적 계보라는 측면에서 사상가들을 다루었듯이 위에 열거한 역사가들을 다룰 것이다. 사상가이자 역사가인 이들이 지닌 양면성과 모순은 물론이고, 지적 역사의 ‘고갱이’를 만들어내는 역사가들의 기이한 버릇을 드러내어 그것을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것은 구체적인 ‘지적 인격’과 감각을 지닌 특정 역사가의 주요 저서나 에세이를 살펴봄으로써만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가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실제로 어떤 일을 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역사가들의 약속과 강박관념, 열정, 특히 서구의 민족국가에서 중요한 조언자 역할을 떠맡고 싶어 하는 역사가들의 상습적인 열망에 흥미를 느낀다. 우리는 역사가들의 몸과 하다못해 그들이 입는 옷에도 흥미를 느끼며, 역사가들 자신은 이 세상에 어떤 모습으로 비치길 바라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역사가의 꿈과 악몽, 불가피하게 그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기벽과 개성도 우리에겐 관심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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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성 안에서 역사와 문학은 서로 빈번하게 충돌했다. 그런 상황에서 많은 역사가들은 그동안 역사의 숙명인 문학적 특징을 인정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역사의 허구적 특성을 누구보다도 역설해온 저 유명한 헤이든 화이트의 말처럼, 역사는 문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역사는 역사 그 자체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는 조사하고 연구하여 얻은 결과물을 묘사를 통해 제시하므로 필연적으로 문학적 형태의 세계로 들어가 문학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 또 우리는 문학적 특질과 형태, 장르가 장식적이거나 단순히 묘사나 분석을 위해 보태진 게 아니라, 현재의 역사가가 과거의 사건이 지니는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설명할 때 도움이 된다는 화이트의 견해에도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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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주장은, 자료의 엄격한 검증으로서의 역사와 문학적 형식을 취하고 있는 역사 사이에 다리를 걸치고 있는 역사의 이중성 때문에 불확실성과 의견충돌이 생기고 창조성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이중성이야말로 지속적인 연구 활동으로서의 역사와 창의적이고 스스로 변화하는 학문으로서의 역사가 지닌 교활함 속에 숨어 있는 비밀일 것이다. 우리가 역사에 매혹당하며 역사를 즐기고 아끼고 사랑하는 건 바로 이런 이중성 때문이다.
우리는 원래 하나였던 역사가 최초의 출발점에서부터 둘로 나뉘었기 때문에 역사의 이중성이 그 자체로 빈번히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 역사의 이중성은 의견 차이와 논쟁이 벌어지는 현장이다. 그 현장에서는 때때로 우호적이고 협조적으로 논쟁이 벌어지지만, 때로는 분노를 주체 못할 만큼 신랄한 논쟁이 오가기도 한다. 역사의 이중성을 고려할 때, 그러한 의견 차이와 논쟁은 불가피하고, 때로는 극적이며, 늘 흥미진진하다. 의견 차이와 논쟁 역시 역사의 본질 가운데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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