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열두 개의 일반적 생각도구
이 책에 실린 생각도구는 매우 전문화되어 있으며 특정한 주제, 심지어 어떤 주제 내의 특정한 논쟁에 적용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하지만 이런 직관펌프를 다루기 전에 다양한 맥락에서 효과가 입증된 개념과 바업인 범용 생각도구를 몇 가지 살펴보자.
1. 실수하기
과학자들은 왜 철학자들이 철학사를 배우고 가르치는 데 공을 들이느냐고 곧잘 묻는다. 화학자들은 화학사를 띄엄띄엄 배울 뿐이고, 많은 분자생물학자들은 1950년경 이전의 생물학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하지도 않는 듯하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철학사의 상당 부분은 아주 똑똑한 사람들이 아주 솔깃한 실수를 저지른 역사이며 그 역사를 모르면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고. 우리가 학생들에게 철학사를 가르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철학에 콧방귀 뀌다가는 큰코다치는 수가 있다. 철학과 무관한 과학, 즉 근본적인 철학적 가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연구되는 생짜 과학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똑똑하거나 운 좋은 과학자들은 그런 위험을 솜씨 좋게 피하기도 하지만(어쩌면 이들은 ‘타고난 철학자’이거나, 그렇다고 생각할 만큼 똑똑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들은 드문 예외다. 그렇다고 해서 전문 철학자들이 오래된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심지어 실수를 옹호하기도 한다. 어렵지 않은 문제는 도전할 가치도 없기 때문이다.
실수를 ‘감수’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실제로 실수를 저질러야 할 때가 있다. 그래야 무엇을 고쳐야 할지 뚜렷하고 자세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실수는 발전의 열쇠다. 물론 수술 의사나 항공기 조종사처럼 단 한 번의 실수조차 용납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실수를 저지르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일 때가 있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명문대에 진학한 학생들은 실수하지 않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실수하지 않았기에 반 친구들을 제치고 명문대에 진학했을 테니 말이다. 그들의 착각인지도 모르지만. 이런 학생들에게는 (최고의 학습 기회인) 실수하는 습관을 길러주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학생들은 머릿속이 하얘지고 출발점에서 하릴없이 서성대며 시간만 낭비한다. 내가 “뭐라도 써!”라고 소리치면 그제야 종이에 뭐라고 끄적거리기 시작한다.
우리 철학자는 실수 전문가다. (고약한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끝까지 들어보시라.) 다른 분야의 학자들은 중요한 질문에 정답을 내놓는 데 전문가이지만, 우리 철학자들은 매사를 엉망으로 뒤섞어서 무엇이 정답인지는 고사하고 무엇이 올바른 ‘질문’인지도 알 수 없도록 하는 데 전문가다. 틀린 질문을 던지는 것은 탐구가 처음부터 꼬일 수도 있다는 것을 감수하는 행위다. 이것은 오로지 철학자만의 임무다! 분야를 막론하고 철학은 애초에 어떤 질문을 던졌어야 하는지 알아낼 때까지 꾸준히 파고들어야 하는 일이다. 이런 일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깔끔하게 설계되고 압출되고 소제되고 대답하기 좋게 다듬어진 기성품 질문만 다루고 싶어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물리학이나 수학이나 역사학이나 생물학을 하면 된다. 할 일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 철학자들은 대답이 가능하기 전에 우선 똑바로 정리해야 하는 질문들에 흥미를 느낀다. 모두가 이런 방식에 적합하지는 않다. 하지만 시도는 해보라. 적성에 맞을지도 모르니까.
이 책에서 나는 다른 사람의 실수(라고 내가 주장하는 것)를 신나게 밟아댈 것이다. 하지만 나 자신도 실수에 잔뼈가 굵었다는 점을 일러둔다. 나는 엄청난 실수를 몇 가지 저질렀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훨씬 많이 저지르고 싶다. 이 책의 한 가지 목표는 모든 이의 길을 밝혀줄 ‘좋은’ 실수를 여러분이 저지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론을 확립했으면 그다음은 연습이다. 실수는 단순한 배움의 기회가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실수야말로 진정으로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것이다. 학습이라는 것이 가능하려면 우선 학습자가 있어야 한다. 학습자가 생겨나는 방법은 기적을 제외하면 두 가지뿐이다. 진화하거나, 진화한 학습자의 손에 설계되고 만들어지거나. 생물학적 진화는 시행착오라는 거대하고 무지막지한 과정을 통해 진행된다. 그리고 ‘착오’가 없다면 시행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고어 비달 말마따나, “성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남들이 실패해야 한다.” 시행은 마구잡이로 할 수도 있고 앞을 내다보고 할 수도 있다. 많은 것을 알되 당면한 질문에 대한 정답은 모른다면 도약을, 앞을 내다보는 도약을 할 수 있다. 뛰기 전에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처음부터 안내를 받을 수 있다. 무턱대고 추측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무작위 추측을 깔보지는 말라. 무작위 추측의 놀라운 결과물 중의 하나는……바로 ‘여러분’이니까!
진화는 나의 모든 책과 마찬가지로 이 책의 중요한 주제다. 진화는 생명뿐 아니라 지식과 학습과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중심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진화에 대한 적절하고 꽤 자세한 지식 없이 개념과 의미, 자유의지와 도덕, 예술과 과학, 심지어 철학 자체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것은 한 손을 등 뒤에 묶어두는 것과 같다. 이 책 뒤쪽에서 진화와 관련하여 더 골치 아픈 질문에 대해 생각하는 도구를 살펴보겠지만, 일단 이 자리에서 주춧돌을 놓고자 한다. 사실 진화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데, 이러한 진화에서 새로운 특징을 얻기 위한 단계는 돌연변이, 즉 DNA ‘오류’를 무작위로 복제하는 과정을 통해 마구잡이로 진행된다. 이 기록 오류의 대부분은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이 오류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교사에게 평가받기 위해 제출하지 않은, 또는 제출하지 않는 보고서 초안처럼 하찮은 것들이다(앞에서 데닛이 학생들에게 “뭐라도 써!”라고 권했듯 초안은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DNA와 차이가 있다_옮긴이). 종種의 DNA는 새로운 몸을 만드는 설계도와 비슷하며 대부분의 DNA는 몸을 만드는 과정에 전혀 이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불용 DNAjunk DNA’라고 부른다.) 발달 과정에서 해독되고 실행되는 DNA 염기서열에서는 대부분의 돌연변이가 해롭다. 실제로 상당수는 순식간에 치명적 결과를 낳는다. ‘발현’된 돌연변이의 대다수가 유해하기 때문에 자연선택 과정은 돌연변이 비율을 매우 낮게 유지하려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세포는 아주아주 뛰어난 복사기다. 이를테면 우리 몸에는 세포가 약 1조 개 있는데 각 세포는 30억 개 이상의 부호로 이루어진 유전체(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했을 때 처음 만들어진 설계도)의 완벽한(또는 ‘거의’ 완벽한) 사본을 가지고 있다. 다행히 복사기는 완벽하지 않다. 그랬다면 진화가 중단되고 새로움의 원천이 말라버렸을 테니 말이다. 이 작은 흠들, 진화 과정의 ‘불완전함’들이야말로 생물계의 온갖 놀라운 설계와 복잡성의 원천이다. (이 말만은 꼭 해야겠다. ‘원죄’라 부를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복제오류일 것이다.)
좋은 실수를 저지르기 위한 핵심 수법은 실수를 (특히, 스스로에게서) 감추지 않는 것이다. 실수를 저질렀을 때 부인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자신의 실수가 마치 예술품인 양 머릿속에서 요모조모 뜯어보는 감정가가 되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예술품이 맞기도 하다. 실수에 대한 기본적 반응은 이래야 한다. “그래, 다시는 ‘그런 짓’ 안 할 거야!” 사실 자연선택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덜떨어진 개체가 번식하기 전에 없애버릴 뿐이다. 자연선택은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적어도 우리만큼 자주 하지는 않는다. 소리 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 철조망을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 어떤 먹이를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 등을 배울 수 있는 동물의 뇌에도 이와 비슷한 선택적 성향이 있다. (B. F. 스키너를 비롯한 행동주의자들은 이런 성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여기에 ‘강화’ 학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 짓’ 반응은 강화되지 않고 ‘소멸’한다.) 우리 인간은 이 일을 훨씬 빠르고 효율적으로 해낸다. 우리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방금 한 일에 대해 반성하고 “그래, 다시는 ‘그런 짓’ 안 할 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반성을 할 때, 실수를 저지른 모든 사람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그런 짓’이 정확히 무엇이었을까?─를 직면한다.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했기에 이런 사달이 난 걸까? 이 문제를 해결하는 비결은 방금 저지른 실수를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파악하여 다음에는 무턱대고 발을 내디디지 말고 이 실수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그때는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았는데!”라는 탄식은 누구나 들어봤을 것이다. 이 구절은 멍청함의 상징이자 얼간이의 후회막심한 탄식을 대표하는 문장으로 통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구절을 지혜의 기둥으로 여겨야 한다. 진심으로 “그때는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았는데!”라고 말할 수 있는 모든 존재, 모든 행위자는 총명의 문턱에 서 있는 셈이다. 우리 인간은 지능을 자부하는데, 지능의 징표 중 하나는 과거의 생각을─과거의 생각이 어땠는지, 처음에는 왜 그럴듯했는지, 뭐가 잘못됐는지─기억하고 반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구상에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종이 인간 말고 하나라도 있다는 증거는 (내가 알기로는) 없다. 만일 그런 종이 있다면 인간 못지않게 똑똑할 것이다.
그러니 실수를 저질렀을 때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이를 악물고 실수를 최대한 냉철하게 들여다보기 바란다. 쉬운 일은 아니다. 실수를 저질렀을 때 당황하고 화내는 것은─자신에게 화났을 때보다 더 화나는 경우는 없다─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이런 정서적 반응을 극복하려면 무척 애써야 한다. 실수를 음미하고, 나를 헤매게 만든 별난 이상異常을 밝혀내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기묘한 습관이 몸에 배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실수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교훈을 흡수한 뒤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실수를 뒤로하고 다음번의 큰 실수 기회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거창한 실수를 저지를 기회를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단, 회복이 가능할 만큼만 거창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초등학교 때 이미 이 기법을 배웠다. 처음에 세로 나눗셈이 얼마나 이상하고 힘들었는지 생각해보라. 내 앞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수가 두 개 놓여 있고 나는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부터 알아내야 한다. 나누는수(제수)는 나뉘는수(피제수)에 여섯 번 들어갈까, 일곱 번 들어갈까, 여덟 번 들어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안담? 알 필요 없다. 아무 숫자나 넣어보고 결과를 보면 된다. 그냥 어림짐작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경악했던 기억이 난다. 이게 ‘수학’이야? 이렇게 진지한 학문에서 찍고 맞히기 게임을 해도 되는 거야? 하지만 누구나 그랬듯 나도 결국 이 기법의 아름다움을 깨달았다. 고른 숫자가 너무 작으면 늘려서 다시 시작하고, 너무 크면 줄여서 다시 시작한다. 세로 나눗셈에서 이 기법의 장점은 언제나 통한다는 것이다. 첫 선택에서 말도 안 되게 바보 같은 숫자를 고르더라도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뿐 결국은 답을 구할 수 있다.
지식을 근거로 추측하고 결과를 파악하고 이 결과를 이용하여 다음 단계에 오류를 수정하는 일반적 기법은 쓰임새가 다양하다. 이 기법의 핵심 요소는 분명한 결과가 도출될 만큼 명확하고 정확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GPS가 등장하기 전에 항해사들은 바다에서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일단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추측한 다음에(자신의 위도와 경도를 ‘정확하게’ 추측했다) 믿기지 않는 우연의 일치로 그 위치가 실제 위치일 경우 태양이 정확히 어느 고도에서 나타날 것인지 계산했다. 이 방법을 쓸 때 처음부터 예상이 적중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항해사들은 태양의 실제 고도를 (정확히) 측정하여 예측 고도와 실제 고도를 비교했다. 사소한 계산을 몇 번 더 하면 애초의 추측에 대해 어떤 방향으로 얼마나 수정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이런 방법을 쓸 때는 처음에 꽤 정확히 추측하는 게 유리하기는 하지만, 오차가 난다고 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실수를, 고치는 것이 의미가 있을 만큼 아주 정확하게 저지르는 것이다. (GPS 장치도 똑같은 예측 · 수정 전략을 이용하여, 하늘에 떠 있는 위성에 대한 자신의 상대적 위치를 계산한다.)
물론 직면한 문제가 복잡할수록 분석도 더 힘들어진다.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이것을 ‘칭찬 할당credit assignment’ 문제라고 부른다(‘비난 할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무엇을 칭찬하고 무엇을 비난할지 파악하는 것은 인공지능에서 가장 까다로운 문제 중 하나이며, 자연선택에서도 같은 문제로 골머리를 썩인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저마다 복잡한 삶의 이야기를 살아간 뒤에 머지않아 죽는다. 어떤 긍정적 요인이 후손에게 ‘보상’하고 어떤 부정적 요인이 대를 끊는 ‘처벌’을 하는지 알아내야 하는 자연선택은 대체 어떻게 이 모든 세부 사항의 안개를 ‘꿰뚫어 보는’ 걸까? 우리 조상의 형제 중 일부는 정말로 ‘눈꺼풀 모양이 잘못돼서’ 자식없이 죽은 걸까? 그게 아니라면, 자연선택은 우리의 눈꺼풀이 지금의 근사한 모양을 가지게 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대답의 일부는 누구나 알 만한 것이다. “긁어서 부스럼 만들” 지 말고 자신의 오래된 보수적 설계해법을 거의 모두 제자리에 두고 안전망을 친 상태에서 시도해보라는 것이다. 자연선택은 지금까지 효과가 있던 것은 무조건 보전하며 크고 작은 혁신을 대담하게 탐구한다. 큰 혁신은 거의 언제나 즉각적인 죽음으로 이어진다. 지독한 낭비이지만 누구도 아쉬워하지 않는다. 우리의 눈꺼풀은 대부분 우리가 인간이기 오래전, 심지어 영장류, 심지어 포유류이기 오래전에 자연선택에 따라 설계되었다. 오늘날의 형태를 갖추는 데는 1억 년 이상이 걸렸으며 최근 600만 년 동안에는 몇 가지 간단한 손질만 더했을 뿐이다. 우리는 침팬지 및 보노보와 조상이 같기 때문이다. 대답의 또 다른 일부는 자연선택이 수많은 사례에 대해 작용한다는 것이다. 사소한 이점도 통계적으로 영향을 미쳐 저절로 축적될 수 있다. (대답의 나머지 부분은 지금의 초보적 논의 수준을 뛰어넘는 전문적 영역이다.)
여기 카드 마술사들(적어도 일급 마술사)이 신기한 묘기를 부릴 때 쓰는 기법이 있다. (이 트릭을 여러분에게 공개했다고 해서 마술사들의 분노를 사지는 않겠지? 구체적 트릭이 아니라 매우 일반적인 원리이니까.) 뛰어난 카드 마술사는 운에 의존하는 트릭을 많이 안다. 이 트릭들은 늘 통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자주 통하지는 않는다. 이런 ‘도박’─트릭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하기에─중에는 1000번에 고작 한 번 성공하는 것도 있다! 방법은 이렇다. 우선 관객에게 자신이 ‘어떤’ 트릭을 쓸 거라고 말한다. 어떤 트릭인지 알려주지 않은 채 1000분의 1 도박에 도전한다. 물론 이 도박은 거의 언제나 실패한다. 그러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두 번째 시도로 넘어간다(이를테면 100번에 한 번 성공하는 도박에 도전한다). 이것도 실패하면─이 또한 거의 언제나 실패하기 마련이므로─우아하게 3번 도박으로 넘어간다. 이번에도 성공률은 10분의 1에 불과하다. 그러니 두 번에 한 번 성공하는 4번 도박을 준비해두는 게 좋을 것이다. 모든 트릭이 실패하면(하지만 이때쯤 되면 ‘대개는’ 앞선 안전망 중 하나가 최악의 상황을 모면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백발백중의 도박을 동원한다. 이 도박은 관객에게 큰 인상을 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효과는 확실한 트릭이다. 마술 공연을 할 때마다 마지막 안전망을 동원해야 한다면 지독하게 운이 나쁜 것이다. 반면에 야심차게 준비한 도박이 성공하면 관객은 넋이 나갈 것이다. “말도 안 돼! 대체 어떻게 제 카드를 알고 계신 거죠?” 아하! 사실은 몰랐지. 하지만 눈 감고 칼을 던지면서도 목표물에 적중하는 근사한 방법을 썼거든. 실수, 즉 실패한 트릭을 관객이 하나도 못 보게 하면 관객은 기적을 본다.
진화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멍청한 실수들은 모두 시야에서 사라지기 때문에,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찬란한 승리의 행진뿐이다. 이를테면 지금껏 살았던 모든 생물의 절대다수(90퍼센트 이상)는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지만, 여러분의 조상은 단 한 명도 그런 불운을 겪지 않았다. 우리는 엄청난 행운아다.
과학이라는 분야와 무대 마술이라는 분야의 커다란 차이는 마술사가 자신의 잘못 꿴 첫 단추를 관객에게 최대한 숨기려 드는 반면에 과학자는 실수를 공개한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모두가 교훈을 얻을 수 있도록 실수를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다. 이렇게 하면 실수의 공간을 헤쳐 나간 나만의 경로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는 동료의 연구 결과에 대해 경멸을 표현 할 때 “틀리지도 못했다”라고 말했다. 비판자와 공유하는 분명한 오류가 애매모호한 헛소리보다 낫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다른 모든 종보다 훨씬 똑똑한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의 뇌가 더 크고 강력해서라기보다는, 심지어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는 법을 터득해서라기보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뇌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시행착오를 일일이 겪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남들 앞에서 큰 실수를 저지르고도 무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정말 똑똑한 사람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저명한 연구자 중에도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이런, 자네 말이 맞군. 내가 실수한 것 같아”라고 말해도 땅이 자신을 집어삼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사실 사람들은 남이 실수를 인정하면 반가워한다. 남의 실수를 지적해주는 일은 누구나 좋아한다. 너그러운 사람들은 도와줄 기회가 생긴 것을 환영하고 성과가 있으면 고마워하는 반면에, 속 좁은 사람들은 남의 실수를 떠벌리기 좋아한다. 그러라지! 어느 쪽이든 모두가 승자이니 말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남들의 ‘멍청한’ 실수를 바로잡는 일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바로잡을 ‘가치’가 있는 어떤 것, 독창적으로 옳거나 독창적으로 그른 어떤 것, 카드 마술사의 트릭에서처럼 아슬아슬한 생각의 피라미드를 쌓아야 하는 어떤 것이 필요하다. 남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신중하게 자신의 생각을 쌓으면 스스로 대담한 이론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놀라운 보너스가 있다. 여러분이 큰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은 여러분이 이따금 저지르는 멍청한 실수를 바로잡는 데서 쾌감을 느낄 것이다. 실수는 여러분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며 남들처럼 실수를 저지르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나는 연구 과정에서 한번도─겉보기에는─실수를 저지르지 않은, 극도로 신중한 철학자들을 알고 있다. 이들은 많은 업적을 이루지 못하며, 그나마도 (결함은 없을지언정) 대담한 결과는 전혀 내놓지 못한다. 이들의 장기는 남의 실수를 지적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값진 기여를 할 수도 있지만, 이들이 사소한 실수라도 저질렀을 때 웃고 넘어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들이 내놓는 최상의 성과는 대담한 사상가들이 모는 꽃마차에 가려 외면당하고 초라해진다. 76장에서는 대담한 실수를 저지르는 관행이 일반적으로는 바람직하지만 안타까운 부작용도 있음을 살펴볼 것이다. 메타 충고: ‘어떤’ 충고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마시길!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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