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에서 정보로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를 창간한 이폴리트 드 빌메상Hippolyte de Villemessant은 정보의 본질을 다음의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우리 독자들은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혁명보다 파리 라틴 숙소에서 일어난 지붕 화재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이를 더욱 구체화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더 이상 멀리서 오는 지식이 아닌, 바로 다음에 일어날 일의 단서를 제공하는 정보만이 공감을 얻는다.” 신문 독자들의 관심은 코앞에 놓인 것 이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호기심거리로 축소된다. 근대의 신문 독자들은 시선을 멀리 두고 머무르는 대신, 하나의 뉴스거리에서 다른 뉴스거리로 관심을 이동시킬 뿐이다. 길고 느리게 머무르는 시선은 독자들에게 없다.
서사, 즉 이야기에 내재해 있는 전승적 지식은, 정보와는 완전히 다른 시공간적 구조로 되어 있다. 일단 지식은 ‘멀리서’ 온다. 이러한 원격성은 지식의 본질적 특성이다. 또한 원격성의 점진적 해체는 근대의 특징이다. 원격성은 무간격성에 자리를 내주며 점차 사라져 간다. 정보란 모든 것을 가용범위에 두는 이러한 무간격의 자연적 발현이다. 반면 지식은 가용범위에 있지 않은 원격성을 특징으로 삼는다. 지식은 가용성과 예측 가능성과는 거리가 먼, 서사가 담긴 사건을 전달한다. 그리고 우리는 운명의 힘에 이끌리듯 그러한 사건에 이끌린다.
정보는 인식의 순간 이후 더는 살아 있지 못한다. “정보는 그것이 새로운 동안에만 가치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만 살아 있다. 오로지 순간의 시점에 사로잡히며 정보 그 자체에 대해 설명할 시간은 없다.” 정보와 달리 지식은 그 순간을 넘어서 앞으로 다가올 것과도 연결되는 시간적 폭이 있다. 그래서 지식은 이야기로 가득하다. 지식 안에는 서사적 진폭이 내재해 있다.
정보는 새로운 것을 찾아 세상을 샅샅이 뒤지는 리포터의 매체다.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 반대의 일을 한다. 이야기하는 사람은 정보를 전달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이야기하기의 예술은 정보를 내주지 않는 것이다. “이야기를 그대로 재현함으로써 설명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이미 이야기하기 예술의 절반을 완성한다.” 내주지 않는 정보, 즉 빠져 있는 설명이 서사적 긴장을 고조시킨다.
무간격성은 근접성과 원격성 모두를 파괴한다. 무간격성과 근접성은 같지 않다. 근접성 개념에는 원격성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접성과 원격성은 상호 의존적이고 서로를 존재하게 한다. 이러한 근접성과 원격성의 조화로운 공동작용은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기록이란 아무리 멀리 있어도 근접성이 발현한 현상이며, 아우라란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원격성이 발현한 현상이다.” 아우라는 서사적이다. 아우라는 먼 것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반면 정보는 원격성을 버림으로써 세계를 탈아우라화entauratisieren하고 탈신비화entzauberen한다. 정보는 단지 세상을 앞에 전시할 뿐이다. 그럼으로써 세상을 손에 잡히도록 한다. 그와달리 먼 곳을 가리키는 ‘기록’은 암시하는 바가 풍부하게 들어 있어 이야기로 이어진다.
근대의 서사적 위기는 세상이 정보를 과포화되는 데 원인이 있다. 이야기 정신은 정보의 홍수에 목이 졸린다.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야기하기 예술이 희귀해졌다면 정보의 확산이 이러한 사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정보는 ‘설명할 수 없고 오로지 이야기로 전해지는 일’은 취급하지 않는다.
이야기에는 경이롭고 의미심장한 무언가가 있다. 이들은 은밀한 것에 반대되는 정보와 결코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설명과 이야기는 상호 배타적이다. “매일 아침이 세상 만물의 새로움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기억할 만한 이야기가 부족하다. 왜일까? 설명이 들어가 있지 않은 일은 더 이상 우리에게 도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벌어지는 거의 모든 일이 이야기가 아니라 정보에 사용되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를 이야기의 대가로 예찬했다. 헤로도토스의 이야기하기 예술을 잘 나타내는 예로, 사메니투스 왕 일화가 있다. 이집트의 왕 사메니투스가 페르시아 왕 캄비세스에게 패배해 붙잡혔을 때, 페르시아의 개선 행진을 억지로 지켜봐야 하는 굴욕을 당했다. 붙잡힌 자기 딸이 하녀가 되어 지나가는 광경도 목도해야만 했다. 길가에 서 있는 모든 이집트인이 슬피 우는 동안 사메니투스 왕은 아무 말도 없이 눈을 바닥에 고정한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뒤이어 자기 아들이 사형장에 끌려가는 것을 볼 때도 그는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그러나 포로로 잡혀 온 사람 중에서 자기 수하에 있던 늙고 허약한 하인 한 명을 알아보았을 때, 그는 주먹으로 머리를 치며 깊은 슬픔을 분출했다.
벤야민은 헤로도토스의 이 이야기에서 진정한 이야기하기라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 벤야민은 이집트 왕이 어째서 하인을 보고서야 비로소 슬피 울었는지를 설명해 내고자 시도한다면, 그건 곧 서사적 긴장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설명을 삼가는 것은 진정한 이야기하기의 필수 조건이다. 서사는 설명을 자제한다. “헤로도토스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의 서술은 그 무엇보다 건조하다. 이것이 바로 고대 이집트의 일화가 수천 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경탄과 숙고를 자아내는 이유다. 이는 마치 피라미드 안에 밀폐된 채 수천 년 동안 보관되어 오늘날까지 발아력이 보전된 씨앗과도 같다.”
벤야민에 따르면 이야기는 ‘모든 걸 내보이지 않는다.’ 이야기는 ‘그 힘을 내면에 모은 채 보전하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다시 펼쳐낼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정보는 완전히 다른 시간성을 보인다. 정보는 좁은 최신성의 폭 때문에 매우 빠르게 소진된다. 정보는 오로지 찰나의 순간에만 작동한다. 영구한 발아력을 지닌 씨앗이 아닌, 티끌이나 다름없다. 정보에는 발아력이 결여되어 있다. 한번 인식되고 나면, 이미 확인을 마친 부재중 메시지처럼 무의미성 속으로 침잠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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