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이 책에서는 1941년 12월에 시작되어 1945년 9월 항복문서 조인으로 끝난 전쟁을 ‘아시아·태평양전쟁’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당시 사용된 ‘대동아전쟁’은 너무나 이데올로기 과잉의 호칭이고,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태평양전쟁’도 미일전쟁 본위의 호칭으로, 중국전선이나 동남아시아 점령지의 중요성을 놓치게 될 가능성이 있다. 필자도 편집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던 『이와나미강좌 아시아·태평양전쟁』(2005년) 전 8권에서는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이라는 일련의 전쟁을 ‘아시아·태평양전쟁’이라는 광의의 개념으로 파악할 것을 제창하고 있다. 전후도 포함하는 시간적 확대와 ‘제국’이라는 공간적 확대 가운데 전쟁을 다룬다는 문제의식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문제의식을 계승하면서 이 책에서는 ‘아시아·태평양전쟁을’을 ‘태평양전쟁’에 대신하는 호칭으로 사용하고 싶다. ‘대동아전쟁’ ‘태평양전쟁’을 대신할 적절한 호칭이 달리 발견되지 않는 이유에서이다.
…
여기서 이 전쟁에서의 전몰자 수를 확인해 두고자 한다. 후생성에 의하면 중일전쟁부터 패전까지의 일본인 전몰자 수는 군인·군속 등이 약 230만 명, 외지의 일반 방인(일본인-옮긴이)이 약 30만 명, 공습 등에 의한 국내의 전재 사망자가 약 50만 명, 이상의 합계 310만 명이다. 다만 이 수 가운데에는 조선인과 타이완인의 군인·군속의 전몰자 수, 약 5만 명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 약 310만 명이라는 숫자에는 의문도 적지 않다. 하나는 외지에서의 일반 방인의 전몰자 수 약 30만 명 가운데 계산되지 않은 오키나와 현민의 전몰자 수, 약 9만 5천 명(준 군속을 포함)이 과소한 견적이 아니가, 라는 문제다. 어느 추계에 의하면 오키나와 현민의 전몰자 총수는 약 15~16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공습과 원폭 등에 의한 민간인의 전몰자 수를 약 50만 명이라고 하는 점이다. 이 숫자는 전국전재도시연맹에 의한 조사, <전국 전재도시 공폭사몰자수 일람>을 기초로 하고 있다고 보이지만, 가와사키 시나 나하 시 등 대규모 공습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망자 수의 난이 공란으로 되어 있는 도시가 여러 개 있다. 또 이 숫자는 대규모 공습을 받은 전국 113개 도시의 사망자 수만을 집계한 것이지만, 이외에도 공습을 받은 지역은 상당히 존재했고, 실제의 전몰자 수는 더 많아질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일본인 전몰자 수는 310만 명을 넘을 것이다.
다음에 외국인의 전몰자 수를 보기로 하자. 아시아·태평양 전역에서 미군의 전사자 수는 9만 2천 명부터 10만 명, 소련군은 장고봉 사건, 노몬한사건, 대일참전 이후의 전사자를 합하여 2만 2,694명, 영국군=2만 9,968명, 네덜란드군=2만 7,600명(민간일을 포함)이다.
교전국이었던 중국이나 일본의 점령하에 있던 아시아의 각 지역의 인적 피해는 더욱 심각하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정확한 통계 자료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각국 정부의 공식 발표 등을 기초로 하여 대충 어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견적의 하나로 중국군과 중국 민중의 사망자=1,000만 명 이상, 조선의 사망자=약20만 명, 필리핀=약111만 명, 타이완=약 3만 명, 말레이시아·싱가포르=약 10만 명, 기타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을 합하여 총계로 1,900만 명 이상이라는 숫자를 들 수 있다. 어느 것이나 일본이 싸운 전쟁의 최대 희생자가 아시아의 민중이었다는 사실은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