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처음 그리스 신화를 읽었을 때 신기했던 것 중 하나는 신화의 주인공들이 거의 모두 왕자와 공주라는 점이었습니다. 프시케와 페르세우스, 안티고네, 파리스, 테세우스, 오레스테스, 아리아드네, 나우시카아, 안드로메다, 메데이아 등등 거의 모든 신화에 왕자와 공주가 등장하더군요. 그런데 동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백설 공주」 「잠자는 숲속의 공주」 「인어 공주」 「개구리 왕자」 「백조 왕자」 「행복한 왕자」처럼 아예 제목에 왕자나 공주가 들어간 동화가 셀 수 없이 많았죠. 「라푼젤」 「신데렐라」 「미녀와 야수」처럼 제목에는 왕자나 공주가 없어도 주인공이 왕자나 공주인 동화도 많았고요. 안데르센의 동화 「공주와 콩알」1835에는 진짜 공주를 감별하는 방법까지 나옵니다. 열두 겹의 매트리스와 열두 겹의 오리털 이불 밑에 완두콩 한 알이 들어가 있어도 불편해서 제대로 잠을 못 자는 사람이 진짜 공주랍니다. 도대체 서양에는 공주가 얼마나 많았길래 이런 공주 감별법까지 있었을까요? 어른이 된 후 짧은 역사 지식을 동원해서 이 궁금증에 대한 답을 제 나름대로 찾아보기로 했죠.
16세기 말에 중앙 집권식 근대 국가들이 생겨나기 이전,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노르웨이, 스코틀랜드, 이베리아반도,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 유럽 전역에는 수많은 소왕국이 있었답니다. 독일의 경우에는 1871년 통일 전까지 이 소왕국의 수가 400여 개에 달했다고 하더군요. 거의 모든 도시마다 작은 왕국이 있었던 셈이죠. 고대 그리스에도 아테네, 스파르타, 코린토스, 테베, 마케도니아 같은 도시 국가들이 있었고요. 우리나라에도 부여와 옥저, 동예, 마한, 진한, 변한 같은 여러 나라가 공존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통일 신라 시대 이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있었고요. 이렇게 작은 왕국들이 산재하면 왕자와 공주도 많았을 겁니다. 더불어 왕자와 공주에 관한 신화나 동화도 많이 만들어졌을 테고요. 우리나라에도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 무왕과 선화공주 같은 왕자와 공주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죠. 통일 신라 시대 이후의 왕자와 공주 이야기가 없는 걸 보면, 작은 왕국들이 왕자와 공주 이야기 숫자와 연관돼 있을 거라는 제 추측이 1퍼센트 정도는 맞을 것 같습니다.
작은 왕국이 여럿 존재하고, 왕자와 공주가 많으면 당연히 두 나라의 왕자와 공주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도 많았겠죠? 왕자와 공주의 사랑을 다룬 동화는 “그들은 그 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비극으로 끝나는 왕자와 공주의 사랑도 있죠.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사랑도 그중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낙랑은 통일 신라 이전에 한반도 북부에 존재했던 중국 한漢나라의 행정 구역인 낙랑군樂浪郡이거나 그 지역에 있던 토착 세력인 낙랑국樂浪國으로 313년 고구려에 의해 축출됩니다. 이 축출 과정에 호동왕자와 낙랑공주가 중요한 역할을 하죠. 김부식1075~1151의 『삼국사기』1145 중 「고구려 본기」에는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고구려의 호동왕자는 옥저로 유람을 나섰다가 낙랑의 왕 최리와 마주쳤다. 호동왕자의 얼굴이 범상치 않다고 생각한 최리는 그를 궁으로 초대했다. 호동왕자는 궁에서 낙랑공주를 보고 서로 한눈에 반해서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 호동왕자는 낙랑공주를 아내로 맞아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자신의 나라인 고구려로 돌아가야 했다. 아버지 대무신왕의 허락 없이 결혼했기 때문에 낙랑공주와 함께 고구려에 갈 수 없었던 호동왕자는 반드시 돌아와서 낙랑공주를 데려가겠다고 약속한 다음 고구려로 떠났다. 고구려로 돌아온 호동왕자는 아버지 대무신왕에게 그동안에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 낙랑공주를 데려오겠다고 했지만, 대무신왕은 공주를 데려오려면 낙랑을 멸망시키고 데려오라고 했다. 호동왕자는 아내에게 몰래 사람을 보내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을 찢고 나팔을 부숴 버리면 예를 갖춰서 아내로 맞이하겠다는 말을 전했다. 낙랑에는 이전부터 적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소리는 내는 북과 나팔이 있었는데 이것을 부수라는 말이었다. 낙랑공주는 몰래 무기고에 들어가서 예리한 칼로 북을 찢고 나팔의 입을 자른 다음 이를 호동왕자에게 알렸고, 그는 왕에게 권해서 낙랑을 습격했다. 최리는 북과 나팔이 울지 않아 대비를 하지 못했고 적병이 성 밑에 이른 다음에야 북과 나팔이 부서진 사실을 알았다. 이것이 딸의 소행임을 알게 된 최리는 딸을 죽인 다음 고구려군에게 항복했다.
― 김부식,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1145년.
설마 마법의 북과 나팔이 파괴됐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낙랑이 망하진 않았을 겁니다. 낙랑공주 이야기는 낙랑의 멸망을 여성의 탓으로 돌리고 싶어 하는 남성중심적 역사관의 산물일 수도 있고, 아버지를 배신하는 딸은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가부장제 사회의 경고일 수도 있습니다. 낙랑공주처럼 적국의 왕자와 사랑에 빠져서 조국과 아버지를 배신한 공주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에서도 여럿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먼저 크레타의 공주 아리아드네를 살펴보고, 다음 글에서 콜키스의 공주 메데이아와 메가리시의 공주 스킬라에 대해 차례로 이야기할 예정입니다.
아리아드네 이야기는 호메로스기원전 8세기의 『오디세이』와 『일리아드』에 스치듯 언급되고, 플루타르코스Plutarch, 40~120년대의 『영웅전Lives』 중 「테세우스」편과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 Naso, 기원전 43~서기 17/18의 『변신 이야기』서기 8년에 등장합니다. 사실, 『영웅전』에서도, 『변신 이야기』에서도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의 영웅담에 조연으로 잠깐 얼굴을 비칠 뿐입니다. 블라디미르 프로프Vladimir Propp, 1895~1970가 『민담 형태론Morphology of the Folktale』1928에서 제시한 등장인물의 역할 구분을 토대로 거칠게 표현하자면, 아리아드네는 영웅Hero/Protagonist인 테세우스가 적Villain/Antagonist인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는 데 도움을 주는 조력자Helper 정도로 등장합니다.
크레타의 왕 아스테리온은 제우스와 에우로페의 세 아들을 입양해서 길렀는데, 아스테리온이 죽은 후 세 형제 중 미노스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미노스는 포세이돈에게 자신의 왕위 계승을 정당화할 징표를 보내달라고 기도하고, 포세이돈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거대한 흰 황소를 보내죠. 그런데 미노스는 이 황소를 포세이돈에게 제물로 바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다른 황소를 대신 제물로 바칩니다. 포세이돈은 미노스를 벌하기 위해 미노스의 아내 파시파에를 황소와 사랑에 빠지게 했고, 그 결과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태어납니다. 미노스는 아테네의 장인 다이달로스에게 미노타우로스를 가둬둘 미로를 만들게 합니다. 이 미로는 종잡을 수 없이 얽히고설킨 통로로 이루어져 있어서 다이달로스조차 출구를 찾아 나올 수 없을 정도였죠. 미로 속에 갇힌 괴물은 9년에 한 번씩 제비뽑기로 선택된 아테네 청년들의 피를 먹고 살았습니다. 아테네가 주최한 경기에서 우승한 아들 안드로게오스가 다른 참가자들에게 살해되자 미노스는 아테네에 전쟁을 선포했고, 아테네가 9년마다 7명의 소년과 7명의 소녀를 미노타우로스에게 먹이로 바치면 전쟁을 끝내겠다고 제안합니다. 세 번째 희생 제물을 바칠 때가 됐을 때,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는 아버지인 아이게우스를 설득해서 제물로 바쳐질 젊은이들과 함께 크레타로 갑니다. 『변신 이야기』에는 아리아드네가 테세우스를 도와준 구체적인 이유가 나와 있지 않지만, 『영웅전』에는 아리아드네가 테세우스를 사랑하게 됐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아이게우스의 아들 테세우스는
미노스의 딸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복잡한 통로에 풀어놓은 실마리를 따라
이전에 누구도 되돌아 나오지 못했던
입구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8권.
테세우스는 크레타섬에 도착했을 때, 대부분의 고대 역사가와 시인들이 우리에게 말해주듯이, 자신을 사랑하게 된 아리아드네로부터 실타래를 받았고, 그것을 이용해서 구불구불한 미로를 빠져나오는 법을 알게 됐다. 그는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미로에서 탈출한 다음, 아리아드네와 젊은 아테네 포로들과 함께 배를 타고 떠났다.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테세우스」편.
| 앙겔리카 카우프만,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 1782년. 캔버스에 유화. 개인 소장.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Theseus_and_Ariadne_(Kauffman).jpg#/media/File:Theseus_and_Ariadne_(Kauffman).jpg 제공. |
18세기의 대표적인 여성 화가 앙겔리카 카우프만Angelica Kauffmann, 1741~1807의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Theseus and Ariadne』1782에는 아리아드네가 미로를 빠져나올 해결책인 실타래를 테세우스에게 건네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여성이 화가가 될 수 있는 길이 원천 봉쇄됐던 17, 18세기에 여성 화가도 남성 화가와 마찬가지로 종교나 신화를 주제로 한, 소위 고상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미술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 ‘어, 실타래가 너무 짧지 않나? 저걸로는 몇 걸음도 못 가서 실을 다 써버리지 않을까?’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어쨌든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한 후 이 실타래를 이용해서 무사히 미로를 빠져나와 아리아드네까지 데리고 크레타를 떠납니다. 그런데 그 후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설명은 텍스트마다 다릅니다. 그래도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가 ‘그들은 그 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로맨스의 공식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은 같습니다.
아이게우스의 아들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를 데리고
즉시 낙소스를 향해 돛을 올렸으나,
잔인하게도 바닷가에 아리아드네를 버려두고
떠나 버렸다. 혼자 남은 소녀는 구슬피 울었지만,
디오니소스가 그녀를 받아들이고 도움을 베풀었다.
디오니소스는 그녀의 머리에 두른 왕관을 떼어내
하늘 높이 던져서
그녀를 영원한 별로 유명해지게 만들었다.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8권.
아리아드네가 디오니소스와 결혼하면서 북쪽왕관자리라는 별자리까지 선물로 받았으니, 아리아드네의 이야기를 해피엔딩으로 봐야겠죠? 필멸의 존재인 아리아드네가 불사의 여신으로 승격된 것이 나쁜 일은 아니니까요. 아래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88/90~1576의 『박카스와 아리아드네Bacchus and Ariadne』1522~1523는 위의 『변신 이야기』 속 아리아드네 신화를 바탕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아리아드네의 어깨 너머로 멀어지고 있는 테세우스의 배가 보이고, 아리아드네에게 첫눈에 반한 디오니소스는 아리아드네의 왕관을 하늘로 던지고 있습니다. 그림 왼쪽 상단에 보이는 하얀 점 여덟 개는 북쪽왕관자리Corona Borealis입니다. 그런데 이 별자리는 실제로는 여덟 개가 아니라 일곱 개로 이루어져 있고, 원형이 아니라 ‘ㄩ’ 형태입니다.
| 티치아노 베첼리오, 『박카스와 아리아드네』, 1522~1523년. 캔버스에 유화, 176.5 × 191 cm. 국립미술관, 런던. |
그런데 『영웅전』과 『오디세이』는 이와 다른 결말을 보여줍니다.
아리아드네에 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지만, 모두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테세우스에게 버림받고 목매 자살했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테세우스의 선원들에게 낙소스섬으로 끌려가서 바쿠스의 사제인 키나루스와 결혼했다고 한다. 또한 테세우스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그녀를 떠났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테세우스」편.
아르테미스는 디오니소스의 입회하에 낙소스섬에서 아리아드네를 죽였다.
― 호메로스, 『오디세이』, 11권.
『변신 이야기』에 비해 훨씬 더 비극적이죠? 도대체 왜 아르테미스는 아리아드네를 죽였을까요? 호메로스가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아서 그 이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또한 위 세 텍스트 어디에도 테세우스가 잠든 아리아드네를 버려두고 낙소스섬을 떠나버렸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오비디우스의 또 다른 작품인 『여주인공들The Heroides』에는 “내가 잠자는 동안 (테세우스가) 나를 배신했다”라는 아리아드네의 말이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이 『여주인공들』은 여성의 관점에서, 그것도 버림받은 여자 주인공들이 남자 주인공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서한집입니다. 『변신 이야기』가 남성을 대변한다면, 『여주인공들』은 여성에게도 목소리를 부여한 특이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미술 작품에서 아리아드네는 잠들어 있거나 막 잠에서 깨어나 테세우스를 찾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 『잠자는 아리아드네』, 바티칸 박물관.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leeping_Ariadne_2.jpg#/media/File:Sleeping_Ariadne_2.jpg 제공. |
그렇다면 낙소스섬에 아리아드네를 버려두고 아테네로 돌아간 테세우스는 잘 먹고, 잘 살았을까요? 크레타로 떠나기 전 테세우스는 아버지 아이게우스에게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하면 흰 돛을 달고 돌아오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런데 그만 이 약속을 잊고 검은 돛을 달고 아테네로 돌아오죠. 아이게우스Aegeus는 아들이 죽은 줄 알고 바다에 몸을 던져 죽고 맙니다. 이때부터 이 바다의 이름이 ‘에게해Aegean Sea’가 됐답니다. 그 후 테세우스는 그리스 남부 아티케 반도를 정치적으로 통일하고 아테네의 중앙 집권화를 이뤘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에서 테세우스를 로마 건국자인 로물루스의 삶에 비유하죠. 켄타우로스를 무찌르기도 했고요. 빈의 미술사 박물관에 들어서면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앙에 커다란 몽둥이로 켄타우로스를 내리치는 무시무시한 테세우스의 조각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 안토니오 카노바, 『켄타우로스를 무찌르는 테세우스』, 1805-1819년. 대리석, 340 × 370 cm. 미술사 박물관, 빈. |
테세우스는 소포클레스의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기원전 441년경에도 등장합니다.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테베를 떠난 오이디푸스를 아테네로 받아들여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해준 사람이 바로 테세우스입니다. 테세우스는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1595~1596에도 등장합니다. 이 극에서 그는 첫 번째 부인인 아마존의 여왕, 히폴리테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죠. 히폴리테가 죽은 후, 놀랍게도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의 동생인 파에드라와 다시 결혼합니다. 그런데 파에드라는 테세우스와 히폴리테 사이에서 태어난 의붓아들 히폴리투스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녀는 사랑을 고백했다 거부당하자 히폴리투스가 자신을 강간했다고 테세우스에게 일러바칩니다. 테세우스는 파에드라의 말을 믿고 히폴리투스를 저주하며 내쳐서 죽음에 이르게 하죠. 이 내용을 담고 있는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히폴리투스Hippolytus』기원전 428는 1962년에 『페드라Phaedra』라는 영화로 현대적으로 각색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죽어도 좋아』라는 제목으로 상영됐고요. 히폴리투스 역의 앤서니 퍼킨스Anthony Perkins가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를 배경으로 ‘페드라’를 외치며 자동차를 질주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테세우스의 말년은 그다지 평탄하지 못했어요. 쿠데타로 축출당해 섬에서 살다가 암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까요. 셰익스피어는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했는데 별로 좋은 결말은 아니죠?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 신화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이 신화를 인생의 여정에 대한 은유로 간주하는 겁니다. 미로Labyrinth는 혼란스러운 삶의 경로를, 미노타우로스는 위험이나 난관을 나타내고, 아리아드네의 실타래Ariadne’s thread는 미로 같은 복잡한 삶에서 위험이나 난관을 헤쳐 나가는 데 필요한 지혜를 나타내는 은유고요. 이런 해석을 바탕으로 ‘아리아드네의 실’은 흔히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나타내는 관용어구가 됐습니다.
| 『미로 속의 미노타우로스』, 16세기 판화. 팔라초 스트로치 소장품, 피렌체. |
그런데 이보다 범위를 좁혀서 이 신화를 영웅 서사로 간주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 1904~1987은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1949에서 주인공이 모험을 떠나 위기를 이겨내고 변모한 사람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는 ‘영웅의 여정hero’s journey’을 3부출발, 입문, 회귀로 나누고 이것을 다시 17단계로 세분해서 설명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모험모험에의 소명을 떠나 아리아드네조력자이자 멘토의 도움으로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하고갈등 해소 아테네로 돌아와서귀환 왕위에 오르는 (변신) 과정을 보여주는 테세우스 신화는 영웅의 여정에 대한 완벽한 알레고리가 됩니다. 그런데 이런 영웅 서사에서 여성은 항상 조력자의 위치에 머물러야 하는 한계가 있죠. 아리아드네를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주체로 다시 읽어내는 일은 페미니스트들이 맡았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은 먼저 아리아드네를 가부장제 사회에 도전해서 자기 의지로 운명을 결정하는 진취적인 여성으로, 테세우스에게 미로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알려 주는 지혜와 직관을 지닌 현명한 여성으로, 테세우스에게 버림받았지만,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서 디오니소스와 결혼한 강한 여성으로 새롭게 읽어냅니다. 앞에서 이미 말씀드렸듯이 미노스는 포세이돈이 보내준 흰 황소를 제물로 바치겠다는 약속을 어겼고, 그에 대한 벌로 아내 파시파에가 황소와 사랑에 빠져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낳았습니다. 남편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아내가 처벌받는 지극히 전형적인 가부장제적 사고방식을 보여주죠. 헤라가 바람을 피운 제우스 대신 상대인 세멜레나 이오를 처벌하고, 아테나가 자기 신전을 더럽힌 포세이돈 대신 메두사를 처벌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가부장적 사회에서 딸이 아버지와 조국을 배신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도전입니다. 확고한 자기 의지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죠. 또한 미로에서 탈출할 방법을 알아낸 아리아드네는 뛰어난 지적 능력을 보여주는 여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리아드네가 이 탈출 방법을 스스로 찾아낸 것이 아니라 미로를 만든 다이달로스에게 부탁해서 알아냈다고 적은 신화 텍스트도 있습니다. 설사 그렇다 해도 그것도 아리아드네의 뛰어난 수완을 보여주는 한 증거가 될 수 있죠.
내가 당신에게 준 실타래가 없었다면
당신은 죽었을 거예요.
― 오비디우스, 『여주인공들』.
테세우스에게 아리아드네는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다 미노타우로스를 제거하는 데 필요한 일종의 도구였습니다. 그는 목적을 달성한 후 쓸모가 없어진 아리아드네를 가차 없이 버립니다. 그것도 “아무도 없는” 무인도예요. 위 그림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에 디오니소스가 수많은 남녀 신도를 이끌고 있고, 저 멀리 해안을 따라 도시가 형성되어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 걸 보면 티치아노가 『여주인공들』을 토대로 위 그림을 그리지 않은 건 분명합니다. 크레타 왕국과 미노스 왕이 자신을 배신한 아리아드네를 받아줄 리도 없지만, 사실 이 섬에는 아리아드네가 타고 돌아갈 배도 없습니다. 일반적인 그리스 신화라면 아리아드네는 체제에 도전한 벌로 무인도에서 굶어 죽거나, 짐승에게 잡아먹혔거나, 『영웅전』에 나온 것처럼 자살했겠죠. 신에게 도전한 인간이 예외 없이 처벌받듯이 아버지로 대변되는 가부장제에 도전하는 딸/여성은 반드시 처벌받았으니까요. 그런데 『변신 이야기』에서 아리아드네는 처벌 대신 오히려 더 큰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아리아드네가 디오니소스 신과 결혼해서 불멸의 여신으로 거듭나게 됐으니까요. 이것은 아리아드네가 잔인하게 버려진 피해자에서 회복력 있고 힘 있는 생존자로 변모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리아드네가 전통적인 비극적 결말에서 벗어나 힘 있는 인물로 성장한 거죠. 이렇게 아리아드네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여주려는 시도는 그녀에게 새로운 목소리를 부여하는 아리아드네 다시 쓰기로 이어졌고, 그 결과물 중 하나가 제니퍼 세인트Jennifer Saint의 소설, 『아리아드네Ariadne』2021입니다.
페미니스트들이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의 신화를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낸 여성의 이야기로 읽어냈다면, 칼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의 심리학에서는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의 신화를 개별화individuation 과정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어냅니다. 개별화란 개인이 무의식과 의식의 통합을 통해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성장해 가는 심리적, 정신적 발달 과정을 의미합니다.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의 신화에서 미로는 복잡하게 이루어진 정신psyche에 대한 은유입니다. 괴물 미노타우로스는 정신의 어두운 측면, 예를 들면 우리가 두려워하며 감춰 두는 억압된 야만스러운 에너지를 나타내는 은유고요. 테세우스가 미로 속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것은 정신의 어두운 측면인 무의식을 마주하고 통합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정신을 통제하는 데 중심 역할을 하는 자아self를 상징하죠.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테세우스에게 미로에서 길을 찾아 나올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자아도 혼란스러운 개별화 과정에 방향과 의미를 제공해 주니까요.
심리학에서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의 신화를 심리 발달 과정으로 해석했다면, J. 힐리스 밀러J. Hillis Miller, 1928~2021 같은 해체 비평가는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의 신화를 단일한 의미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읽어냅니다. 그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스토리 라인들Ariadne’s Thread: Story Lines」1992에서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전통적인 ‘문제 해결의 실타래’가 아닌, 텍스트의 복잡성과 다의성undecidability을 드러내는 은유로 사용합니다. 밀러는 문학 텍스트를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어려운 미로에 비유합니다. 미로에서 탈출한다는 것은 텍스트에서 단일하고 객관적인 최종 의미를 찾아내는 걸 의미하고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텍스트라는 미로를 빠져나올 수 있게 독자를 인도하는 서사 라인에 대한 은유입니다. 테세우스는 미로 같은 텍스트를 해석하는 독자를 나타내고요. 독자는 서사 라인을 따라 텍스트를 해석하려 하지만 그 해석은 텍스트의 거미줄에 또 다른 줄을 첨가할 뿐입니다. 텍스트라는 미로 위에 서사나 스토리 라인으로 또 하나의 미로를 만들어내는 거죠. 그 결과 텍스트의 의미는 고정되거나 단일하지 않고, 오히려 반복을 통해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끊임없이 생성됩니다. 텍스트에서 서사 라인을 따라가면 단일하고 객관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믿었던 전통적인 비평가들과 달리, 밀러나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 같은 해체 비평가들에게 텍스트는 하나의 고정된 의미나 출구를 제공하지 않고, 의미는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연기deferral될 뿐입니다.
지금까지 일상적인 관점에서, 영웅 서사와 연관해서,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여성학적인 입장에서, 해체 비평의 시각에서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의 신화를 살펴봤습니다.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의 신화는 인생 여정 이야기로, 영웅 서사로, 심리 발달 과정으로, 능동적인 여성 주체의 이야기로, 단일한 의미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아리아드네의 신화를 개인 대 사회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이야기로 살펴보겠습니다. 드디어 딜레마의 두 번째 범주인 개인 대 사회의 딜레마로 넘어왔습니다.
먼저 아리아드네의 신화에서는 언제 결정적인 선택이 이루어질까요? 당연히 아리아드네가 테세우스에게 실타래를 건네는 순간이죠.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실타래를 건네기 전에 심각하게 고민했을 겁니다. ‘테세우스를 도울 것인가? 말 것인가?’ 이 선택 역시 어느 쪽을 택하든 부정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는 딜레마입니다. 아테네는 크레타와 전쟁을 벌이다가 어쩔 수 없이 미노타우로스에게 사람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굴욕적인 상황에 놓여 있죠. 그러니까 두 왕국은 휴전 중이지만 준전시準戰時 상태에 놓여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죽이러 온 적국의 왕자입니다. 설사 미노스 왕이 수치스러워하며 미로 속에 가둬둔 괴물이라 해도 미노타우로스는 그에게 아들이죠. 왕비가 낳았으니까요. 아리아드네에게는 친동생이고요. 아리아드네가 테세우스에게 미로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실타래를 주고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 주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형제를 배신하는 행위입니다. 설사 신-인간-짐승으로 삼분화된 고대 그리스 사회의 질서 체계에서 반인반수 괴물인 미노타우로스는 반드시 제거되어야 하는 대상이라 해도 말이죠. 또한 안드로게오스의 죽음에 대해 아테네에 복수할 방법을 사라지게 만든다는 점에서 아버지 미노스 왕을 배신하는 행위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적국인 아테네 왕국을 이롭게 한다는 점에서 조국인 크레타를 배신하는 것이죠. 테세우스에게 실타래를 준다면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의 사랑을 얻을 수 있지만 가족과 조국을 배신하게 됩니다. 반대로 테세우스에게 실타래를 주지 않는다면 가족과 조국을 지키는 대신 테세우스의 사랑을 얻을 길은 영원히 사라지고 말 겁니다. 테세우스가 자신을 돕지 않은 아리아드네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미로 속에서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없어질 테니까요. ‘테세우스를 도울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선택의 문제는 한쪽을 선택하는 순간 동시에 다른 한쪽은 포기해야 하는 딜레마입니다.
‘테세우스를 도울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아리아드네의 딜레마는 먼저 체제에 대한 저항 대 권위에 대한 순응혹은 복종이라는 대립 구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조국을 배신하는 것은 체제와 권위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을 포기하고 아버지와 조국을 배신하지 않는 것은 체제에 대한 순응이고요. 권위에 대한 저항 대 권위에 대한 순응이라는 이 대결 구도는 개인의 자유사적 이익 대 국가 이익공적 이익, 혹은 간단히 개인 대 사회의 대립 구도로 세분화할 수 있습니다. ‘테세우스를 도울 것인가?’라는 질문은 ‘테세우스에 대한 사랑을 따를 것인가?’로, 이것은 다시 ‘나 개인의 행복을 추구할 것인가?’로 이어집니다. 반면에, ‘테세우스를 돕지 말 것인가?’라는 질문은 ‘아버지의 뜻을 따를 것인가?’로, 이것은 다시 ‘크레타의 국익을 추구할 것인가?’로 확대되고요. ‘테세우스를 도울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질문은 ‘사랑을 위해 나라를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나라를 위해 사랑을 포기할 것인가?’가 되고, 이 질문은 개인의 자유와 공공의 이익에 대한 문제가 됩니다.
‘사랑을 위해 가족과 나라를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가족과 나라를 위해 사랑을 포기할 것인가?’라는 아리아드네의 선택에서 개인 대 공동체의 대립을 드러내는 요인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행복을 추구하는 개인적인 감정이지만 기존의 사회 규범에 도전하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이념과 계급, 지위와 인종, 종교와 국적 같은 온갖 분류를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 사랑이니까요. ‘가문을 버리고 사랑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사랑을 버리고 가문을 선택할 것인가?’라고 고민하는 로미오와 줄리엣 역시 아리아드네의 복사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 로미오, 로미오. 왜 당신은 로미오인가요?
당신 아버지의 이름을 부정하고, 당신의 이름을 거부해요.
아니,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내 사랑임을 맹세해 줘요.
그러면 나는 더 이상 캐풀렛이 아니에요.
― 윌리엄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2막 2장.
사실, 개인과 사회는 대립 관계라기보다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개인이 없으면 사회도 존재하지 않고, 사회를 벗어나 혼자 사는 것도 불가능하니까요. 이론적으로는 개인과 공동체의 이익은 정비례합니다. 개인이 잘 되면 공동체에도 좋으니까요.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이 『정부소론A Fragment on Government』1776에서 말한 것처럼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옳고 그름의 척도가 될 수 있죠. 반대로 개인의 피해가 누적되면 공동체 전체가 피해를 볼 수 있고요.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개인과 공동체의 이해관계가 어긋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면 ‘개인이 중요한가? 아니면 공동체가 더 중요한가?’라는 문제가 대두하죠. ‘개인의 이익과 공동체의 이익 중 어느 것을 우선시할 것인가?’의 문제는 인류에게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딜레마로 남아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수많은 철학자와 사상가가 답을 제시했죠. 그중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이클 센델Michael Sandel, 1953~ , 존 롤스John Rawls, 1921~2001의 답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Politics』기원전 4세기에서 정치공동체인 도시 국가 폴리스polis가 가족과 개인보다 앞선다고 주장했습니다. 손이 신체의 일부로서만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처럼,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개인은 자기 잠재력이나 자립심을 온전히 실현할 수 없다는 겁니다. 센델 역시 공동체의 중요성을 역설하고요. 그는 『정의론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2009에서 공동체의 미덕과 연대, 공동선 추구를 통한 정의 실현을 강조합니다. 그는 복지를 극대화하거나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공리주의적 견해나 자유주의적 견해에 반대하면서 공동체의 “좋은 삶”을 강조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센델과 달리 롤스는 공동체의 이익보다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합니다. 그는 『정의란 무엇인가?A Theory of Justice』1971에서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되,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이 존재할 경우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 이익이 되도록 조정하는 차등의 원칙을 적용하는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정의의 세 가지 원칙 중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 ‘균등한 기회의 원칙’과 ‘최약자 보호의 원칙’보다 우선이라고 명시함으로써, 개인의 자유가 공동체의 이익보다 더 중요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샌델이 공동체의 이익에 주안점을 뒀다면, 롤스는 개인의 이익과 자율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거죠.
여러분은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이익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여러분이 아리아드네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사랑을 위해 가족과 나라를 포기하시겠어요? 아니면 가족과 나라를 위해 사랑을 포기하시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