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과 무신론자의 대화
타인에 대한 사랑이
공동선의 씨앗입니다
정리·스칼파리
<라 레푸블리카> 2013년 10월 1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내게 말했다. “오늘날 세상을 괴롭히는 가장 심각한 재난은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실업과 노인들이 처해 있는 고독입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곁에서 돌봐 줄 손길이 필요하지요. 젊은이들에게는 일과 희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필요한 것들을 얻지 못했고, 불행하게도 이제 더는 그런 것들을 찾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현재라는 시간에 짓눌려 버렸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현재에 짓눌린 채 살아갈 수 있습니까? 과거에 대한 기억도 없고 미래로 나아가려는 욕구도 없이, 계획을 세우고 앞날을 꿈꾸고 가족을 꾸리려고 노력할 의지도 없는 상태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런 식으로 계속 견뎌 나가는 것이 가능합니까? 제 생각에는 그 점들이 바로 교회가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스칼파리 교황 성하, 그것은 근본적으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문제입니다. 국가와 정부와 정당과 공동 조합syndicate의 소관이지요.
프란치스코 교황 그래요, 그 말이 맞아요. 그러나 교회의 소관이기도 하지요.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가장 먼저 교회가 나서야 하는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현재 상황은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에도 상처를 입히기 때문이지요. 교회는 사람들의 영혼과 육체에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스칼파리 성하께서는 교회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교회가 이 문제를 의식하지 않았으니 이제라도 민감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프란치스코 교황 넓은 의미에서 의식하기는 했지요. 그러나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저는 교회가 이 문제를 더 심각하게 의식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가 당면한 유일한 문제는 아니지만,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임은 틀림없지요.
프란치스코 교황과의 만남은 지난주 화요일 그의 거처인 산타 마르타 관館의 작은 방에서 이루어졌다. 가구라고는 탁자 하나와 의자 대여섯 개가 전부인 방이었다. 장식은 벽에 그림 한 점이 다였다. 우리의 대화는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되었는데, 나는 전화를 받았던 그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오후 두 시 삼십 분이었다. 내 전화기가 울렸고, 비서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교황님 전화예요. 지금 바꿔 드릴게요.” 내가 말없이 멍하니 있을 때, 성 베드로가 수화기 너머 저편에서 먼저 말을 건넸다.
프란치스코 교황 안녕하세요, 저는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스칼파리 안녕하세요, 성 베드로 성하.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당황스럽군요. 제게 전화를 주시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거든요.
프란치스코 교황 왜 당황하십니까? 저에 대해 알고 싶다고 하시면서 제게 편지를 쓰시지 않았나요? 저 또한 선생님에 대해 알고 싶었어요. 그래서 만날 약속을 정하기 위해 전화를 드렸지요. 일정표를 한번 볼게요. 수요일은 약속이 있고, 월요일도 그렇고, 화요일에 시간 내실 수 있나요?
스칼파리 좋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시간이 잘 맞지 않을지도 모르겠군요. 오후 세 시 어떤가요? 혹시 불편하시면 다른 날을 잡도록 하지요.
스칼파리 저도 그 시간이 괜찮습니다, 성 베드로 성하.
프란치스코 교황 그럼 24일 화요일 오후 세 시로 약속을 정한 겁니다. 산타 마르타 관에서요. 성청聖廳의 정문으로 들어오셔야 할 겁니다.
그렇게 하여 지금 나는 그의 방에 도착했다. 교황이 방 안으로 들어와서 내 손을 잡았고,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그가 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 당신에 대해 잘 아는 제 동료 중 한 사람이 말하길, 당신이 저를 개종시키려 들 거라더군요.
스칼파리 그럴 리가 있나요. 제 친구들도 성하께서 저를 개종시키려 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그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남을 개종시키려 드는 건 실로 허황된 짓이지요.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어요. 서로를 알고,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대한 이해를 늘려 나가야지요. 어떤 만남이 있고 나면 그 만남을 한 번 더 가지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어요. 머릿속에 새로운 생각이 찾아들고 새로운 욕구가 생겨나기 때문이지요. 서로를 알고,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고, 생각의 반경을 넓히는 것, 우리에게는 바로 그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는 온갖 길들이 이리저리 뻗어 나가면서 서로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는데, 중요한 건 그 길들이 모두 선善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스칼파리 교황 성하, 선에 대한 유일한 시각이 존재합니까? 있다면 누가 그 시각을 결정하는지요?
프란치스코 교황 모든 인간 존재는 선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악에 대해서도 그 자신만의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사람들이 스스로 선이라고 판단한 것이 열어 주는 길을 따르도록 이끄는 것이지요.
스칼파리 교황 성하, 저한테 보내 주신 편지에도 그렇게 쓰셨지요. 의식은 자율적이어서, 우리 각자는 자신의 의식에 따라야 한다고 말이지요. 제 생각으로 그 말씀은 아직 어떤 교황도 하지 못한 가장 용기 있는 말씀이 아닐까 합니다만.
프란치스코 교황 저는 그 말을 언제든 되풀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우리 각자는 선과 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있으니만큼, 스스로 선택해서 자기가 세운 입장과 견해에 따라 선을 따르고 악을 물리쳐야 하지요. 더 나은 삶을 사는 데는 그런 노력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스칼파리 교회도 그런 노력을 돕는 데 나서고 있나요?
프란치스코 교황 그렇습니다. 우리의 소명은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물질적으로나 비물질적으로 어떤 욕구를 가지고 있는지 가늠하여 그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도록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이지요. 아가페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요?
스칼파리 네, 알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우리의 주님이 가르쳐 주셨듯이, 아가페는 타인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것은 남을 개종시키려는 마음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입니다. 타인에 대한 사랑, 그것이야말로 공동선의 씨앗이지요.
스칼파리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그 말씀이지요?
프란치스코 교황 네, 바로 그것입니다.
스칼파리 예수는 타인에 대한 사랑인 아가페가 신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설교하셨지요. 제가 틀렸으면 바로잡아 주세요.
프란치스코 교황 아니요, 그 말이 맞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인간들의 영혼 속에 형제애의 감정을 심어 주기 위해 강생하셨습니다. 모두가 형제이고 모두가 하느님의 자식입니다. 그분은 하느님 ‘아바’를 ‘아버지’라고 부르셨지요. 그분은 말씀하셨어요. “내가 곧 길이다. 나를 따르면 ‘아버지’를 만나 모두가 그의 자식이 될 것이고, ‘아버지’는 너희와 더불어 만족해하실 것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타인을 사랑하는 아가페야말로 구원과 하늘나라의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예수가 우리에게 제시한 길입니다.
스칼파리 하지만 조금 전에 말이 나왔듯이,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치시길, 이웃에 대한 사랑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사랑과 같아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렇게 보자면 우리가 흔히 나르시시즘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인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가치 있고 긍정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이미 오랫동안 토론을 벌였지요.
프란치스코 교황 저는 자신에 대한 무절제한 사랑을 가리키는 나르시시즘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르시시즘은 어느 모로 보나 적절치 않아요. 왜냐하면 그런 감정에 사로잡힌 당사자의 영혼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타인들이나 사회와 맺는 관계에도 무척 심각한 해를 입히기 때문이에요. 게다가 정말로 심각한 문제는, 이런 유의 사랑에 빠진 사람들, 어떤 식으로든 정신적 장애를 겪고 있다고 해야 할 그 사람들이 보통 많은 권력을 쥐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도자들은 대개가 나르시시스트입니다.
스칼파리 교회의 품 안에 있는 상당수의 지도자도 마찬가지지요.
프란치스코 교황 요즘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십니까? 지금까지 교회의 지도자들은 추종자들이 아첨하는 말에 넘어가서 나르시시스트가 되곤 했지요. 신하들을 거느리는 궁정 같은 분위기가 교황제도의 나병이에요.
스칼파리 교황제도의 나병이라, 무척 인상적인 표현이군요. 그런데 궁정이란 로마 교황청을 빗대어 말씀하시는 건가요?
프란치스코 교황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물론 로마 교황청에도 때로 아첨하는 신하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황청 전체가 그렇지는 않아요. 교회에서 궁정 같은 곳은 우리가 군대에서 병참기지라고 부르는 기관에 해당됩니다. 이 기관은 병참기지와도 같은 권한으로, 교황청이 필요로 하는 공공 업무들을 관리합니다. 하지만 이 기관에는 결점이 있어요. ‘바티칸 중심적’이라는 점이지요. 어떻게 해서든 바티칸을 위해 이득을 올리려 애쓰는데, 그것이 여전히 대부분 세속적인 이득이라는 점이 문제입니다. 오직 바티칸에 중심을 두는 이런 편협한 시각은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등한시하게 합니다. 저는 그런 입장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변화를 꾀하기 위해 제힘이 허락하는 한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들을 위한 공동체이고, 사람들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는 수도사들과 사제들과 주교들은 하느님의 백성들을 위해 봉사를 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바로 그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라는 말과 교황청이라는 말을 혼동해서는 안 되는데, 교황청은 물론 중요하지만 교회를 위해 일하는 곳일 뿐입니다. 만약 제가 교회의 품 안에서 성장하지 않았다면, 저는 하느님과 그분의 아들에 대해 충만한 믿음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르헨티나에 머물 때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제게 큰 행운이었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누구인지 그리고 신앙심을 가진다는 게 무엇인지 결코 자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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