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왜 유네스코는 문자보존에 관심을 가질까?
문자는 인간의 기억을 돕는 보존성과 기록성이 큰 장점입니다. 인간이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사는 것도 문자의 기록성에 의해 조상의 슬기와 지혜를 전승하고 발전시키기 때문입니다. 또한 문자의 보존성으로 인해 문자에는 해당 언어가 사용되는 문화를 이해하는 고유의 방법이 담겨 있습니다. 문자를 알면 역사를 알게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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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는 1999년에 2월 21일을 ‘세계 모어의 날’로 정했습니다. 언어와 문화다양성은 사회통합을 강화하는 인류 보편의 가치로 2000년 유엔이 채택한 ‘새천년개발목표MDGs’와 ‘모두를 위한 교육EFA’ 목표 달성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며, 해당 언어가 사용되는 문화를 이해하는 방법을 담고 있습니다. ‘세계 모어의 날’은 사라져가는 다양한 모어들의 의미를 돌이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언어는 개인과 그가 속한 사회의 정체성 형성, 나아가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양한 문자의 보전은 인류의 힘과 기회의 원천입니다. 이는 문화다양성을 상징하며, 다른 시각을 교류하고, 아이디어를 개선시켜, 상상력을 키우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양질의 교육 기회를 제공해 주고 사회 변화에 대응하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유네스코는 사라져가는 언어를 되살리고 일반인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넓히기 위해 문해교육을 강조합니다. 문해literacy는 ‘일상생활” 속에서 간단한 문장을 읽고 쓰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합니다. 문해교육은 문자를 모르는 이들에게 삶의 질을 높이고, 모든 이들이 평등하고 차별 없는 사회를 형성하는 데 이바지 할 것이라 기대합니다.
세계 비문해 분포는 빈곤 분포와 거의 일치합니다. 교육 받을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은 자신의 사회에 기여할 수 없으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합니다. 문해는 어둠을 깨뜨리는 빛입니다. 문자 교육 및 문자를 모르는 이를 위한 유네스코의 노력은 단지 문자 학습뿐만 아니라, 상호이해, 그리고 넓은 의미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호모 리테라리엔시스(Homo literariensis, 문자를 사용하는 인간)
지구상에는 6,000여 종의 언어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문자로 적을 수 있는 언어는 40여 종에 불과합니다. 유럽에는 208종의 언어가 분포하고 있고, 아시아에는 2,304종이 분포하여 전 세계 언어의 약 29%를 차지합니다. 이러한 언어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절반 가량의 언어들이 소멸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인류 최초의 문자는 동굴벽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굴벽화의 동물 그림이나 사냥하는 모습은 시간이 남아서 그려진 것이 아니라, 주술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짐승을 사냥하고 안전하게 귀가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림은 문자의 역사 유아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문자는 인간이 만들어낸 보석 같은 존재입니다. 주술적인 차원의 그림 문자를 넘어서, 수를 기록해서 잉여산물을 기록하는 수단이 되었고,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또한 경제의 규모가 커지고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서 점토판에서 갈대의 파피루스로 전래되는 형태인 설형문자로 발전해 나가게 되었습니다.
문자 사용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집트 최초의 문자는 기원전 3100년, 인더스강 유역은 기원전 2500년, 크레타는 기원전 1900년, 중국은 기원전 1200년, 중앙아메리카는 기원전 600년에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통해, 한 문자의 특정한 기호가 아니라 문자 사용의 개념이 한 문화에서더 먼 문화로 점진적으로 전파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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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아홉가지 문자에 대하여
문자의 큰 줄기는 이집트 문자, 설형문자, 한자로 분류됩니다. 또한 문자는 표음문자는 알파벳, 표의문자는 한자로 대별됩니다. 문자를 쓰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페니키아 문자, 셈 문자, 아라비아 문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고, 인도 문자, 그리스 문자, 키릴 문자, 한글은 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며, 몽골 문자, 파스파 문자, 한자는 위에서 아래로 쓰는 형식입니다.
문자는 지역에서 다양한 문화를 흡수하고 역사적 진화를 거치면서 변화해 왔습니다. 문자의 원천이 발생한 세계 3대 문명이 아시아 지역에서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아시아는 오랫동안 다양한 종교와 문화, 전통이 어우러진 곳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고유 글자를 가지고 있는 민족은 오래갑니다.
문자는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차원에서 해석하고 미래의 희망을 제시하는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아시아의 다양한 문자를 동아시아 문자(한글, 한자, 일본 문자), 동남아시아 계통(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인도 문자, 아랍 문자, 키릴 문자 (인도 데바나가리 문자, 아랍, 몽골)로 나누어 구성해 보았습니다.
① 동아시아 문자
한글 | 언어만 있거나 문자만 있는 민족은 역사성이 없습니다. 한민족도 오랫동안 자체 고유문자가 없어서 민족정체성 형성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한글은 근대에 들어와서 한국인의 고유문자가 되었습니다. 한글은 기본자음(ㄱ, ㄴ, ㅁ, ㅅ, ㅇ)에 “리가 거세어짐에 따라 하나씩 획을 더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귀신의 소리도 흉내낼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음소문자로 꼽힙니다. 영어처럼 문자와 발음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한글은 유네스코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했을 정도로 우수한 문자입니다. 현존하는 문자 중 유일하게 만들어진 시기와 목적, 작자가 명확히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한자 |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쓰고 있는 한자는 다른 문자에 비해 자수가 많습니다. 실제로는 1만자 정도가 쓰이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한자는 중국 전설에 의하면 기원전 3000년경 복희씨가 처음으로 주역의 팔괘를 그렸고, 기원전 2700년경 창힐이 주역의 팔괘를 기초로 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한자는 사물의 이미지(상형)에서 시작했지만, 기호가 되면서 이미지보다는 뜻으로 정착되었습니다. 그래서 서예와 회화는 그 뿌리가 연결됩니다. 한자는 풀어 헤쳐져 서예가 되고, 좀 더 심오하게는 그림이 됩니다. 한자를 쓰게 되면 여백이 남듯이, 한자는 한 폭의 동양화처럼 글자의 뜻과 의미 전달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일본 문자 | 일본어로 사용되는 문자는 히라가나, 가타가나, 한자의 세 종류가 있습니다. 300년대 초에 한자는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전래되었습니다. 한자의 총수는 약 5만자가 넘고 문자체도 다양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한자를 변형시켜 일본말을 표현하는 문자를 만들었습니다. 현재 일본에서 사용하는 한자는 2,136자라고 합니다.
한편 일본에서는 문자를 그림처럼, 혹은 그림의 일부분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모티콘의 원조로 불리는 것이 일본 ‘모지에’입니다. 또한 일본에서는 한자 퍼즐을 즐겨 하고 있습니다. 일본 문자는 지식의 저장소이기도 하면서 놀이의 수단이기도 해서 사람들에게 친숙합니다.
② 동남아시아 문자
동남아시아는 한자문화권과 인도문화권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베트남 문자는 주로 한자로부터, 태국 문자는 인도 문자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태국어는 라오어와 캄보디아어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에 반해 도서부에 위치한 인도네시아는 섬으로 이루어져 다양한 언어가 사용되지만, 라틴 문자를 활용한 바하사 인도네시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베트남 | 베트남에서는 고대 왕조의 안정화와 더불어 한자의 사용이 확대되었습니다. 10세기에는 한국의 이두처럼 한자의 소리와 뜻을 베트남 음운에 맞게 고쳐 만든 ‘쯔놈’이라는 글자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石(돌 석)과 “多(많을 다)를 ’쳐 써 놓고 ‘다da’라고 읽는데, 이것은 베트남어로 ‘돌’을 뜻합니다. 즉, 한자의 소리(多)와 뜻(石)으로 만든 베트남어 표기법인 것이지요. 이런 표기체제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듣기만 해도 뜻을 이해할수 있게 해 줍니다. 현재의 베트남 국어는 ‘꾸옹응어’인데, 이 언어는 17세기 초 프랑스 선교사 알렉산드흐 드 호데 신부가 베트남 말을 라틴 문자로 표기하여 만들어 주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태국 | 태국어(파싸타이)는 고대 인도에서 사용한 문자를 본 따서 만든 크메르족과 몬족의 문자로부터 유래했습니다. 이 문자는 13세기 수코타이 왕국의 람캄행 대왕이 만들었습니다. 태국어는 라오스 문자와 유사합니다. 그래서 라오어 및 문자를 쓰는 사람과 태국어 및 문자를 구사하는 사람끼리는 상당부분 의사소통이 가능합니다. 두 문자 모두 한글처럼 소리문자여서 자음과 모음을 결합하여 문자를 만들고 소리를 냅니다.
인도네시아 | 오늘날 인도네시아인들은 라틴 문자(알파벳)를 사용해 인도네시아어를 씁니다. 국어인 ‘바하사 인도네시아’는 쉽게 라틴 문자로 쓰여집니다. 아랍 문자의 영향을 받은 자위문자 등은 간혹 간판이나 사원 등에서 볼 수 있고, 자위문자는 ‘아랍말레이 문자’로도 불립니다. 바하사 인도네시아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 등의 국가에서 제2언어 또는 제3언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③ 인도 힌디어 문자
인도에 있는 수백 개의 소수민족 언어에는 아직 서체가 없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구전이 선호되어 왔습니다. 인도의 브라만은 오랫동안 문자를 말보다 열등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기원전 8세기경까지 인도 대륙에서는 문자가 쓰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문자 쓰기가 번창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언어와 문자로 위대한 문학을 구현했습니다.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풍부하고 가장 다양한 문학적 전통을 지닌 곳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느 인도인 학자에 따르면, 오늘날 인도에서는 거의 석 달마다 하나 꼴로 문자가 생긴다고 합니다. 현재 인도에는 3,372개 언어가 있으며. 힌디어와 영어가 공식 언어입니다.
④ 아랍 문자
아랍 문자는 ‘신이 선을 긋고 사람이 점을 찍었다’라는 어떤 포스터에서 그 특성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이 말은 문자의 숭고함을 잘 나타내 줍니다. 유일신 알라의 계시를 집대성한 이슬람교의 성전인 꾸란도 아랍 문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꾸란은 신의 말씀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슬람어의 아랍 문자도 숭배대상이 됩니다. 아랍지역에서는 더 이상 말을 기록하기 위해서만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아랍 서예에서 문자의 아름다움은 아랍 문자를 유지하는 데 큰 몫을 했습니다.
⑤ 몽골 문자
몽골 하면 칭기스칸이 생각나고, 칭기스칸 하면 유목민을 거느린 장면을 연상하게 되지요. 이런 유목민의 언어 중 고대 투르크 문자는 유목민들로서는 최초로 만든 문자입니다. 이런 고유의 문자 전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몽골은 현재 키릴 문자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몽골인들은 유목인의 특성처럼 여러 문자를 사용해 왔습니다. 원나라시대에는 파스파 승려가 개발한 네모꼴의 파스파 문자를 쓰기도 하였고, 아울러 현재 내몽골에서 쓰고 있는 전통 몽골 문자(몽골 비칙)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구소련에서 독립한 외몽골에서는 1994년부터 몽골 비칙을 사용해 왔지만, 1941년부터 사용한 키릴 문자에 익숙해진 관계로, 세로로 쓰는 몽골 문자의 전산화에 불편을 느꼈습니다. 따라서 몽골은 사회주의 국가 혁명 이래로 사용했던 키릴 문자를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발달: 디지털 문자로의 전환
중국에서 8세기에 발명된 목판인쇄술과 11세기에 발명된 활판인쇄술 덕분에 문자의 사용이 확산되었습니다. 뒤이어 15세기에 구텐베르크 활자 발명에 따라서 문자를 인쇄한 책들이 다량으로 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아름다운 글자체가 많이 출현해서 일반인들이 알아보기 쉽고 친숙한 글자체가 생겨났으며, 문자는 예술 차원으로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21세기 정보화시대에 이르러 문자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문자는 종이나 동판에 활자화되는 것을 넘어서 전자화면상으로 나타나는 흐름으로 변했습니다. 문자는 속도를 띠게 되면서 순식간에 내 글을 수천 명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의 발달은 역설적으로 글쓰기의 중요성을 부각시켰습니다. 과거에는 전화나 직접적인 만남으로 소통되던 많은 부분이 이제는 인터넷상의 글쓰기를 통해 이뤄집니다. 개인 간 연락이나 회사 내 업무 전달을 대부분 이메일로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일상이나 생각을 글로 써서 블로그나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리는 사람도 많습니다. 또한 페이스북, 트위터 등을 통해 정보는 거의 빛의 속도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문자를 보면 그 나라의 문화, 역사가 보인다.
말의 보존과 전달을 위해 인류가 발명한 것이 문자였습니다. 문자를 통해 지식이 보존, 축적, 전달되었고 문명이 발달하였습니다. 이를 통하여 원격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졌을 뿐 아니라 사회적 공감이라는 지평을 구출하여 역사의식도 확립되었습니다.
문자, 그리고 문자의 흥망은 무엇보다도 고대사회에서의 권력의 동향을 나타내는 지표였습니다. 고대 스키타이는 문자가 없었고 문화를 전혀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문자가 없는 민족은 빨리 잊혀지지만, 소수민족이어도 글을 많이 남긴 민족은 위대한 글을 남겨 계속 기억됩니다.
언어는 음악이고 문자는 그림입니다. 언어는 시간이고 문자는 공간입니다. 음악과 그림이 어울리고 시간과 공간이 어울린다면, 문자는 인간의 문화 그 자체입니다. 언어나 문자는 표현의 자유를 통해 사람들의 공감대 형성에 기여하고, 사람들이 속한 사회의 정체성 형성, 나아가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필요한 요소입니다. 문자는 말의 보존과 전달을 위해 발명한 것이었습니다. 문자는 인간의 영혼과 지식이 축적된 그릇입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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